기약 없는 '리디노미네이션'…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손지혜 / 기사승인 : 2019-04-19 10:2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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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할 때 됐다"던 이주열 총재, 한달도 안돼 "추진 계획 없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도 "논의할 단계 전혀 아니다"며 선 그어
"지하경제 양성화, 경기부양 효과" vs "인플레, 부동산투기 등 혼란"

'리디노미네이션'(화폐단위 변경)은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인가. "필요하다"면서도 '실행'은 없다. 십수년째다. 노무현 정부때 시도했다가 실패한 이후 간간이 필요성만 언급될 뿐 더 이상의 시도는 없다. 당시 한국은행은 만반의 준비를 갖췄으나 인플레이션 등 부작용을 우려한 정부의 반대에 막혔다.


▲ 1962년 화폐 액면변경 조치 당시 구권을 신권으로 바꾸려는 인파가 은행 앞에 몰려 있다. [국가기록원]


당시 한은 총재였던 경제석학 박승은 자서전〈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에서 "시행하지 못한 게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박 전 총재는 "청와대 보고 후 수락을 받으면 3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2008년 1월 1일부로 시행하려고 모든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고 소개했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실행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다. 주무기관 수장인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슬쩍 얘기를 꺼냈다가 주워 담았다. 3월25일 "논의할 때가 됐다"(국회 업무보고)며 논의에 불을 붙이더니 한달도 안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고, 가까운 시일 내에 추진할 계획도 없다"(4월18일 금통위후 기자간담회)고 밝혔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도 18일 "정부는 검토한 바 없다. 경제활력을 제고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입장에서 지금 논의할 단계가 전혀 아니다"라고 했다.

이 총재가 운을 떼면서 논의 물꼬가 다시 트이기는 했다. 학계·금융권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정치권에서 관련 토론회를 준비중이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소속 이원욱·심기준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5월 중순 '리디노미네이션을 논한다'는 이름의 정책토론회를 연다. 그러나 경제부총리와 통화정책 당국 수장이 선을 그은 마당에 당장 추진동력을 기대하기 어려운 형국이다.


▲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4월18일 오전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 금융통화위원회에서 의사봉을 두드려 개회를 선언하고 있다. 이 총재는 금통위 후 기자간담회에서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해 "추진 계획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정병혁 기자]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의 단위를 바꾸는 것이다. 과거 한은 계획으로는 원화의 액면금액을 1000원에서 1원으로 낮추자는 것이다. 현재 5000원인 커피 한잔 가격이 5원으로 바뀌는 것이다. 간단해 보이지만 그 여파는 혁명적인 것이다. 이 총재가 "기대효과 못지않게 부작용도 많기 때문에 그야말로 신중히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 이유다. 홍 부총리도 "사회적 충격도 크고 국민적 공감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이렇듯 긍정적 기대효과 못지 않게 부정적 효과의 위험성도 크다. 정치적 부담이 상당할 수밖에 없다. "언제가는 해야 할 일"이라는 공감은 있으나 "지금 당장 해야 한다"는 추진력이 생기지 않는 이유다. "물가가 안정되다 못해 디플레이션을 걱정해야 하는 지금이 적기"라고 말하는 박 전 총재 조차도 "당장 급한 일은 아니다"고 여지를 뒀다.

"경제규모 13등, 화폐가치 200등"

리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한 이유와 기대 효과가 몇가지 있다. 먼저 국격의 문제다. 현재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달러와의 교환비율이 4자리인 나라는 한국 뿐이다. 한은에선 "1대 1000이 뭐냐. 한국이 아직도 후진국인가"라는 얘기가 나온 지 오래다. 교환비율 자체로 원화의 대외 위상이 너무 떨어진다는 얘기다.


▲ 해방이후1953~1962년의 화폐 [국가기록원]


수십년의 경제성장, 소득증가, 물가인상도 이유다. 국내에서는 지금까지 두 차례의 리디노미네이션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3년 2월 거액의 군사비 지출 등으로 인플레이션 압력이 날로 커지고 있었다. 이를 수습하기 위해 정부는 액면단위를 100대 1로 낮추고 화폐단위는 '원'에서 '환'으로 변경했다. 100원이 1환으로 바뀌었다. 1962년 6월에는 지하자금 양성화와 과잉통화 흡수 목적으로 화폐단위를 다시 '환'에서 '원'으로 바꾸고, 액면단위를 10대 1로 낮췄다. 10환이 1원이 됐다. 이후 현재까지 57년간 동일한 화폐·액면단위가 유지되고 있다.

57년새 한국은 폭풍성장했다. 1962년 당시 명목 국내총생산(GDP)는 3658억 원이었지만 지금은 1782조 2689억 원(2018년 기준)으로 4872배 뛰었다. 이제 기업회계에선 액면단위가 경(京)원에 이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원화로 표시하려면 0을 16개나 붙여야 한다. 이미 민간에서는 이런 불편을 덜기 위해 커피가격 4500원을 4.5로 표시하거나, 음식가격 1만2000원을 12.0로 표시하는 등 리디노미네이션을 자체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2015년 리디노미네이션 추진을 주장했던 박명재 자유한국당 의원은 당시 발간한 정책자료집에서 "(원화 단위는)국제적으로 통용되기 어려울 만큼 단위가 크고 복잡하다"면서 "경제규모는 13등이지만 화폐 가치는 200등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리디노미네이션의 기대 효과로는 지하경제 양성화, 내수경기 부양 등이 우선 꼽힌다. 최 의원은 특히 궁극의 효과로 지하경제 양성화를 지목한다. 지하경제란 국가 규제나 세금 부과 등을 피할 목적으로 조성되는 '숨어 있는 돈'이다. 뇌물이나 도박 등 불법적인 과정을 거쳐 조성된 자금도 지하경제에 속한다. 화폐단위가 바뀌면 지하경제에 숨어 있던 돈들이 새 화폐로 '교환'되기 위해 '양지'로 나올 수밖에 없다. 최 의원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지하경제 규모를 보면 통상 GDP의 10% 수준인데 대한민국은 지하경제 규모가 GDP의 25~30%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며 "금액으로 따지면 300조원이 넘는 돈이 세금을 피해가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단지 0을 떼는 문제가 아니다"


홍 부총리의 지적처럼 사회적 충격과 혼란을 걱정하는 전문가들이 적잖다. 수조∼수십조원의 사회적 비용을 들여야 하지만 경제적 편익은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우선 물가인상을 촉발하고, 특히 부동산 투기로 이어질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예컨대 1900원짜리 상품이 1.9원이 되면 상인들은 상품가격을 2원으로 올릴 가능성이 크다. 부동산 투기 가능성도 같은 맥락이다. 6억 8000만 원짜리 집이 68만원이 되면 갑자기 집값이 싸보여 70만원으로 쉽게 오르를 수 있다는 것이다.

거꾸로 소비심리가 위축되는 효과도 예상된다. 최배근 건국대 교수는 "소득 단위가 작아지니 내가 적게 번다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그 만큼 덜 쓴다"면서 "화폐 가치만 정상화하자는 취지인데, 경제 활동에 쇼크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 집값은 소득의 몇 배 이상 되는 큰 돈이기에 리디노미네이션으로 인한 부동산 투기가 우려처럼 심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사진은 작년 9월 12일 롯데월드타워에서 바라 본 서울시내 아파트의 모습. [정병혁 기자]


부동산 투기가 우려처럼 심하지는 않을 거란 전망도 있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호가가 반짝 오를수는 있겠지만 (투기가) 오래 가지는 못할 것 같다. 집값이란 것은 소득의 몇 배 이상 되는 큰 돈이기 때문에 집값에 리디노미네이션의 영향이 크게 미치기는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하 교수는 "가장 큰 부작용은 단위를 바꿈으로써 발생할 혼란과 비용"이라고 말했다. "회계 전산과 ATM 기계 등을 바꿔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메뉴판까지 모든 단위를 바꿔야 하니 큰 비용이 소모될 수 있다"고 했다.

아직 비용과 편익이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것도 문제다. 최 교수는 "리디노미네이션은 소비와 환율, 부동산 등 여러가지 경제적 측면과 연결 돼 있어 단행될 경우 결과가 어디로 튈지 모른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대내외 경제의 불확실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불확실성이 추가 될 경우 리스크가 하나 더 얹혀지는 것과 같다"면서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 원장은 페이스북에 "금융시장 혼란 등 부작용이 클 것"이라며 "최저임금 급등에 이어 또 하나의 생체실험으로 경제를 아주 망가뜨릴 작정이 아니라면(하지 말아야 한다)"이라고 밝혔다.


"리디노미네이션, 지금이 적기"


리디노미네이션은 박승 전 한은 총재의 지론이다. 여전히 "노무현 정부때 했어야 했다"는 게 박 전 총재의 생각이다. 연장선에서 박 전 총재는 "당장 급한 건 아니지만 언젠가는 해야 하고, 물가가 안정된 지금이 적기"라고 말한다. "현재 인플레이션 걱정과 비용 걱정을 안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상되는 충격을 감안할 때 실행까지는 또 상당한 논의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사회적 공감대가 우선 마련돼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정책토론회를 준비중인 이원욱 의원실 관계자는 "시장은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지만 정작 실질적 변화가 있었던 적은 없다"면서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한 유의미한 자료 조차 없기 때문에 이를 위해서라도 토론회를 추진하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초당적 차원에서 학계와 전문가들을 모시고 5월 중순 추진 필요성, 부작용 등에 대한 다양한 찬반 논의를 벌일 것"이라고 말했다. 국회에서 화폐개혁 관련 토론회가 열리는 것은 5만원권 도입 여부를 두고 논쟁이 뜨거웠던 2005년 이후 처음이다.

정치권에서 논의의 물꼬는 트이는 셈이다. 박 전 총재는 "가급적 빠를수록 좋다. 이걸 해내는 대통령은 역사에 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UPI뉴스 / 손지혜 기자 sjh@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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