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 위기 속 '한국방송의 뿌리'를 찾는다

김강석 / 기사승인 : 2019-09-03 22: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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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길화PD 특별기고] 9월3일 '방송의 날'을 톺아본다
▲ 정길화 MBC PD (12대 PD연합회장) [PD저널 제공]

 

올해 9월 3일은 제56회 방송의 날이다. TV, 라디오 등 지상파 방송의 생일이다. 대부분의 방송사에서는 이날이 휴무일이다. 물론 방송은 중단 없이 송출된다. 통상 방송의 날에는 방송협회 주최로 축하연이 열린다. 정관계, 재계 고위급이 참가하고 방송계의 유명한 셀럽도 참석하곤 한다. 방송대상 시상식도 개최된다. 1년 단위로 방송문화 창달과 한국방송 발전에 기여한 프로그램과 방송인들을 격려하고 축하하는 날이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성과를 이룬 현장 방송인들이 상을 받고 수상소감으로 사자후를 토한다.

이렇듯 '방송의 날'은 방송과 방송인에게는 1년에 한 번 있는 뜻깊은 축제의 날이다. 신문업계에 신문의 날이 있듯, 방송업계에는 방송의 날이 있는 것이다. 여담이지만 방송의 날이 주중에 있으면 평일 휴무일이라 골프를 좋아하는 일부 방송인들에게 부킹하기 좋은 날이기도 하다. 교외의 물좋은 골프장에서는 어쩌면 '나이스샷'을 외치는 일군의 방송인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상파 방송의 위기 속에 맞은 방송의 날

이제 방송과 방송인들에게 그런 좋은 시절은 가고 있다. 마냥 놀고, 상도 받고, 잔치하고, 골프치는 그런 방송의 날은 이제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른다. 방송의 날 행사를 주관하는 방송협회는 올해 방송의 날 기념 리셉션을 취소했다. "(지상파가) 유례없는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어 고심 끝에 올해 축하연을 취소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국내외 미디어간 극심한 경쟁과 개선되지 않는 지상파에 대한 비대칭 규제를 원인으로 들고 있다.

지상파 방송사업자들의 권익단체인 방송협회는 올해 방송의 날에 축하연 대신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방송의 위기는 지난 10년 결과물로서, 이 위기는 종사자들이 제대로 대비하지 못한 것이 주된 이유라고 비판했다. 또 다른 참석자는 시청자들이 방송에 시간을 줬지만 방송이 계속 시청자들을 실망케 했다고 지적했다. 시청자들이 기다렸던 방송을 보여주지 못했고 더 이상 시간을 달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미디어오늘, PD저널 관련기사 발췌).

그런데 이 '방송의 날'에 등장하는 '방송'은 애오라지 '지상파 방송'이다. 케이블, 위성방송, DMB, IPTV, 종편, OTT. 등은 해당되지 않는다. TV모니터로 콘텐츠를 본다고 해서 다 같은 방송이 아닌 것이다. 모니터를 벗어나서 PC, 태블릿 그리고 모바일로 방송을 보는 세상이다. 반세기 전에 '방송의 날'을 제정한 이들은 오늘날 방송의 모드가 이렇게 다종다양(多種多樣)하게 될 줄은 어쩌면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예의 방송의 날 토론회에서도 참석자들은 방송 앞에 반드시 지상파를 붙여 '지상파 방송'이라고 호명함으로써 다른 플랫폼과 구별했다.

'방송의 날'의 기원

주지하다시피 9월 3일은 1947년 미국 애틀란타 시에서 개최되었던 국제무선통신회의(ITU)가 한국의 무선통신 호출부호 'HL'을 부여한 날이다. 이 HL을 실제로 사용하기 시작한 날은 1947년 10월 2일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미군정기였는데 호출부호는 정부 수립 전부터 사용하게 된 모양이다. 이전까지는 일제 강점기에 사용하던 JO 호출부호를 해방 이후에도 답습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실제로 1947년 9월 30일까지 JODK를 사용했다).

그 이전에는 방송계에는 생일이라고 할 '방송의 날'이 없었다. 처음으로 방송의 날을 제정, 시행한 때는 박정희 정권 들어서인 1964년부터다. 정부가 수립된 1948년을 기점으로 잡아도 물경 16년 동안 우리 방송에는 생일이 없었던 것이다. 일제하 경성방송국 JODK의 개국일인 2월 16일을 효시로 삼기에는 그 무렵의 방송인들도 아마도 내키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1964년 9월에 제1회 방송의 날을 제정할 때는 HL 첫사용일인 10월 2일을 기념일로 삼았다.

1964년이면 기존의 KBS, CBS, MBC에 이어 DBS, TBC 등의 방송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다투어 출범할 무렵이다(이상 개국 순).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새로운 미디어인 방송을 주시하면서 이들을 잘 관리할 필요성이 있음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기존 매체, 요즘말로 하면 레거시 미디어인 신문매체는 박정권이 다루기에는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것이다(물론 이들도 정권의 당근과 채찍에 점차 순치되어 갔다). 어떻든 '방송의 날' 지정도 그런 선심과 용의에서 나왔을 개연성이 있다.

9월 3일 유감

그런데 1978년에 들어 방송의 날은 10월 2일에서 9월 3일로 바뀐다. 이 과정이 석연치 않다. 당시 기록을 보면 '전파주권을 실질적으로 회복한 것은 전파를 배당받은 날'이라는 이유로 9월 3일로 변경했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날 '9월 3일 방송의 날'의 기원이다. 전파주권은 뜬금없는 얘기다. 어차피 미군정기에 무슨 주권은 주권이겠는가. 9월 3일이나 10월 2일이나 그게 그거다. 그렇다면 필경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현대사통(通)인 성공회대 한홍구 교수에 따르면 기존에 10월 2일로 시행하던 방송의 날을 1977년에 2월 16일로 옮겼다가 이를 다시 바꾸면서 9월 3일로 변경했다고 한다. 정리하면 1964년에서 1976년까지 23년간은 10월 2일, 1977년에 1년만 2월 16일, 그리고 1978년에 9월 3일로 시행한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왔다 갔다한 이유는 1차적으로는 '국군의 날' 때문으로 보인다.

국군의 날과 방송의 날이 무슨 상관이냐 하실텐데 박정희 정권하인 1976년에 10월 1일 국군의 날이 돌연 공휴일로 지정이 된 것과 관련이 있다. 구글에서 1976년 10월의 달력을 검색해 보니 당시 10월 1일은 금요일. 그 시절엔 주5일제는 생각도 못했을 시절이다. 10월 2일 토요일이 방송의 날이니 1976년 당시 방송사 종사자들은 금요일(국군의 날), 토요일(방송의 날), 일요일 등 연속으로 유사 이래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3일 연휴를 누렸을 것이다(당근 방송사에 한한다).

'국군의 날' 공휴일로 불똥?

때는 바야흐로 지엄한 유신 시절 당시 말 잘 듣는 방송쟁이들이 깜짝 놀랐을 성 싶다. '중단없는 전진'과 '싸우면서 건설하는 수출 입국'의 그 시절에 3일 연속 휴일이라니 이는 시국에 안 맞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방송협회 등 방송인들이 스스로 놀라 이를 반납하려하지 않았을까. 그러다가 '차제에 진짜(?) 방송의 효시를 찾아가자' 해서 일단 2월 16일로 방송의 날을 변경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아무리 그 시절이라도 지각과 의식이 있는 이들이 있었을 것이니 '일제하 JODK가 방송의 생일이라니 웬말이냐!'라는 논의가 학계와 방송계에서 제기됐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10월 2일로 다시 갈 수도 없는 난감한 지경에서 누군가 'HL 부호를 받은 날이 9월 3일이니 이 날을 방송의 날을 삼자' 해서 이렇게 조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략 안 봐도 비디오다.

그러니까 3일 연휴 사태를 피해 최고 존엄의 심기를 살펴 1977년에 먼저 2월 16일을 방송의 날로 삼았다가, 여론이 비등하자 다급하게 9월 3일을 찾은 것이다. 이는 우리 방송에서 흑역사로 할 만하다. 유신 시기에 방송인들이 정권의 눈치를 보았다는 야사가 더 설득력이 있다. 이런 내력을 들여다 볼 때, 방송의 날이 반드시 9월 3일이어야 할지도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JODK를 어떻게 볼 것인가

돌이켜 보면 이 땅에 처음으로 방송이 울려퍼진 것은 1927년 2월 16일이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방송국이 개국했다. 호출부호 JODK, 출력 1kW, 주파수 870khz였다. JODK 방송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위한 생활정보 위주로, 조선인들에겐 오락거리를 제공하면서 황국신민화와 내선일체를 꾀했다. 박용규는 "일제시기의 방송은 해방 이후 국영방송제도와 관료적 통제구조 그리고 권력순응적인 방송인들의 체질이 형성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분석했다. 그래서일까. 한국방송의 기점을 둘러싼 학계에서의 논의는 분분하다.

정진석은 "한국방송사의 기점은 JODK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1) 일제 강점기에 이 땅에 방송이 존재했다는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2) 초기방송은 총독부의 선전과 홍보를 위한 내용 위주가 아니었다 등을 예거하고 있다. 또한 서재길도 이 시기의 방송을 일본의 방송으로 판단하는 논리는 방송을 전적으로 송신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것으로서 실제로 송출된 방송의 내용과 조선인 라디오 청취자에 대한 고려가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식민지 수탈론의 관점에서 일제 식민시기의 라디오방송을 "일본의 제국 방송의 일부로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일본방송의 성격이 강하다"라고 하여 우리 방송의 출발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각도 엄존하고 있다. 여기에는 최창봉, 강현두 등이 같은 입장을 개진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있었다'는 사실과 그것에 정통성을 부여하여 '우리 방송의 역사'라는 것과는 반드시 일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론' VS '식민지 수탈론'

그러고 보니 지난해 철도의 날이 종전 9월 18일에서 6월 28로 바뀐 일이 생각난다. 기존 철도의 날은 1899년 9월 18일로,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 개통일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일제강점기인 1937년 일제에 의해 지정되어 사용된 것이니 '일제잔재'로 보고 차제에 변경한 것이다. 새 '철도의 날' 6월 28일의 연원은 1894년 6월 28일 이날,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정부조직이 개편되면서 공무아문(工務衙門) 하에 철도국이 설립된 것에서 기인한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이 역시 일제와 무관하지 않다고 비판하는 의견도 있다.

어떻든 일제에 의해 상당 부분의 근대화가 이루어진 우리 근현대사의 뒤안길에서 일본의 영향을 완전히 탈각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어찌 철도나 방송에 한한 일이겠는가. 학계의 논쟁 또한 거칠게 보아 '식민지 근대화론'과 '식민지 수탈론' 사이에 전선이 형성되어 있다. 일제하 방송의 역사를 한국 방송의 정사(正史)에 포함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는 아직 끝나지 않은 논쟁의 영역에 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9월 3일 방송의 날의 대안을 모색해 본다.

 

대안 1. 10월 2일

 

그렇다면 과연 '방송의 날'은 언제로 삼는 것이 좋을까. 이제 유신 시절도 아니니 HL 호출부호를 처음 사용한 10월 2일로 돌아가는 것은 어떤가. 이제는 10월 1일 국군의 날이 휴일도 아니라서 방송인들에 대한 3일 연휴 시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현행 국군의 날도 그 적절성에 대해 논란이 있어 어쩌면 언젠가는 '광복군 창건일'인 9월 17일 정도로 변경, 지정될 수도 있다. 이래 저래 실제 HL 호출부호가 사용된 10월 2일이 방송의 날 기념일로서 더 어울려 보인다.

 

대안 2. 12월 27일

 

한편으로 일제하 단파방송 수신 사건일을 기념하는 것은 어떤가. 1942년 12월 27일 전후로 일어난 이 사건은 JODK에서 근무하던 조선인 직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의 소리 VOA 방송을 듣다가 발생했다. 일제는 1942년 12월 말에서 이듬해 초까지 대대적인 검거를 해 300 여 명을 체포, 탄압했다. 이 사건에 대해 "당시 방송국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민족의식과 저항정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평가한 학자도 있다. 일제말 국어학계의 조선어학회 사건에 비견할 만하다.

 

말하자면 방송전파를 수단으로 삼아 반일 투쟁을 한 것이니, 일제가 도입한 방송 시스템을 방법으로 일제에 되갚아준 것이다. '인도에서의 크리켓의 탈식민화'를 고찰한 아르준 아파두라이 Arjun Appadurai의 이론을 적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2월 27일은 '방송'이라는 외래의 새로운 문화이자 기술이 한국인에 의해 치열하게 발현된 날이다. 다만 여기에 등장하는 내용이 우리의 것이 아닌 VOA 즉 미국의 콘텐츠라는 것은 아쉽다.

 

대안 3. 12월 17일

 

그런데 방송의 기원과 관련해서는 다른 학설도 있다. 가령 12월 17일설이다. 즉 1927년 JODK에 3년 앞선 1924년 12월 17일 조선일보사(당시 사장은 월남 이상재)는 수표교에서 관철동까지 무선전화방송 공개 실험을 실시한 바 있다. 내용은 이동백의 '단가' 독창, 박녹주의 판소리 열창, 홍영후의 바이올린 연주 등이 방송됐다고 한다. 이로 인해 박기성은 "조선일보사의 무선전화방송 공개시험이야말로 한국인의 기술로 성공한 첫 자주방송이므로 한국 방송의 기원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강준만, 『한국대중매체사』, 인물과사상사, 2007).

 

다만 12월 17일을 방송의 날로 채택하기에는 이날의 공개실험이 일과성의 행사에 불과했다는 한계가 작용할 수 있다. 또 여기에 등장하는 특정 신문사가 한국 사회에 끼친 오랜 해악성으로 인해, 12.17이 한국방송의 시발점이라는 그들의 계속적인 자가발전에도 불구하고 여론의 지지가 크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예상된다. 다만 천하의 강준만 교수가 조선일보와 관련되는 역사를 이렇게 긍정적으로 자신의 저술에 소개한 것이 이채롭게 느껴진다.

 

공유되지 않는 현행 '방송의 날'

 

전술(前述)했듯 2.16이든 9.3이든, 10.2이든 이 날은 어쩔 수 없이 '지상파 방송의 날'에 국한된다. 그동안 방통융합과 디지털 혁명이 숨가쁘게 진행했다. 방송기술이 발전하고, 방송제도가 급변하는 국면에서 등장한 케이블, 위성방송, DMB, IPTV, 종편, OTT 등의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기반한 플랫폼의 입장에서는 현행 방송의 날에 대한 공유의식이나 공감대가 부재하다.

 

방송정책의 난맥상과 미디어 난개발의 와중에 이들은 상호 배타적이며 때로는 적대적이다. '방송의 날' 깃발 아래 생일떡을 같이 먹기에는 뿌리가 같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기실 케이블TV의 날이 따로 있고 종편 출범일이 따로 있다. 각각의 생일에 독상을 차린다. 지상파에서 시작해 IPTV와 OTT 쯤에 이르면 거의 다른 세계, 다른 차원의 매체로 보인다. 어쩌면 이들의 출발점은 마르코니의 무선통신일텐데 말이다.

 

이에 대해 방송계의 한 관계자는 "각 매체 간에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아 별로 한 자리에 앉고 싶지 않아 할 것"이라고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뭔가 기념일을 정하고 축제를 지낼 땐 함께 했던 즐겁고 힘들었던 역사와 경험, 기억들이 있어야 한다. 그런 게 없으니 같이 모여서 뭘 하고 싶은 생각도 없을 것이다. 아주 먼훗날 전혀 새로운 미디어환경이 되고 나면 지금의 미디어들 간에 과거 유사한 경험들을 추억하고 싶어할 때가 올지는 모르겠다."라고 부언했다.

 

'방송의 날' 모색은 필요하다

 

이런 마당이라 이제 와서 9월 3일이 방송의 날로 적절하지 않으니 10월 2일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 아니냐 혹은 차제에 논의를 원점으로 돌려 정체성에 맞는 날을 처음부터 다시 찾자. 그래서 일제하 단파방송 수신 사건일인 12월 27일은 어떠냐, 아니 조선일보가 1924년 12월 17일에 우리 기술로는 처음으로 방송실험을 했다고 하니, 이 매체의 평소 소행은 괘씸하더라도(?) 이 날이 방송의 효시로는 맞지 않느냐. 는 등의 논의는 이제 너무나 사치스런 혹은 한가한 말이 되었다.

 

목하 방송의 날은 그저 지상파 방송의 축제로 전락한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는 남상(濫觴)을 모색하는 것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도처에 방송의 사양화와 지상파의 위기를 지적하는 소리가 드높다. 지상파 위기론을 넘어 지상파 동토론이 공공연한 시점에서 더욱 자신의 근본을 되돌아보게 된다. 모름지기 뿌리와 원형은 사물의 본디를 파악하는 첩경이다. 나아가 새로운 플랫폼들도 동의하는 그래서 함께 축제의 장이 될 수 있는 '방송의 날'은 불가능한 것일까. 아마도 그들은 말할 것 같다. '통합 방송의 날'? 혹은 '미디어의 날'? "오 노 댕큐"

 

- 정길화 MBC PD (12대 PD연합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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