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복의 타박타박 지구촌] 새로운 희망을 피우는 거대한 '금속 꽃' 눈길

/ 기사승인 : 2019-09-20 15: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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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②

우리는 일상에 지쳤을 때 여행을 꿈꾸곤 한다. 그냥 떨치고 나서면 다 괜찮아질 것 같아서다. 그러나 세상 일이 마음 먹었다고 다 할 수 있던가. 그동안 이런저런 이유를 만들어 여러 곳을 다녔다. 쉽게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그마한 위로가 되길 바라면서 여행지에 대한 기억을 펼쳐놓으려 한다. 새삼스런 설렘에 나 자신 다시 길 위로 나설지도 모르겠다.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Don't cry for me Argentina).' 에바 페론(Eva Perón)을 다룬 뮤지컬 '에비타(Evita)'의 대표곡 제목이다. 아르헨티나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그녀는 후안 페론 대통령의 부인으로 가난한 사람과 노동자계급을 위한 페론주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여성 정당을 만들어 여권을 확대하는 데도 기여해 국민의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1952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떴다.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가수와 배우로 활동하다 영부인의 자리까지 오른 집념과 열정 가득한 인물로 살아서는 국민의 흠모를 받았고, 죽은 다음에는 국가의 영적 지도자 대접을 받고 있다. 그의 인생 이야기는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작곡으로 1978년 뮤지컬로 탄생했고, 1996년에는 마돈나 주연으로 영화 '에비타'로 만들어졌다. 


▲ 부에노스아이레스 팔레르모 지역의 전경


▲ 플로라리스 헤네리카 [셔터스톡]


그녀가 지금 누워 있는 곳은 레콜레타 묘지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5월 광장과 대통령궁 등 유명 관광지를 둘러본 뒤 플로리다 거리를 구경하면서 천천히 찾아갈 수 있다. 플로리다 거리는 가장 화려한 번화가로 수많은 옷가게, 레스토랑, 카페, 바, 갤러리 등이 늘어서 있어 그다지 길지 않은 데도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보행자 전용 도로여서 인파도 헤쳐야 하고, 거리 공연도 잠깐씩 봐야 하니까. 거리 초입에는 관광 안내소가 있어 지도를 얻을 수 있다. 


▲ 레콜레타 묘지 내부


▲ 에바 페론의 납골실. 위에서 셋째 명판이 에바 페론이다.


부유층 많이 사는 팔레르모-레콜레타 지역


그곳을 지나면 아름드리나무가 서 있는 산마르틴 공원에 닿는다. 굵은 나무들은 넓은 나뭇가지를 펴서 만든 그늘로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그래서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는 직장인들도 나무 밑에서는 잠시 걸음을 늦추는 듯 보이기도 한다. 중앙에는 아르헨티나를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게끔 독립전쟁을 이끈 산마르틴 장군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는데, 주요 국내 행사 때나 아르헨티나를 방문한 국빈들이 기념비에 헌화하기 위해 찾는다. 


산마르틴 공원을 지나면 기차역과 고속버스 터미널이 있는 레티로 지역이 나온다. 이곳은 아르헨티나 국내는 물론 남아메리카 대륙 여러 나라를 연결하는 주요 교통 지역으로 전철역도 있고, 시내버스 노선도 많아 항상 사람이 붐빈다. 다시 걸음을 이어 팔레르모와 레콜레타 지역으로 들어선다. 현재 부유층이 많이 사는 곳으로 규모가 큰 빌딩이 늘어서 있고, 값비싼 골동품이나 최신 명품을 파는 고급 가게도 많이 띈다. 고급 레스토랑들은 완전한 격식을 갖춘 상차림을 준비해두고 있어 간편한 옷차림으로는 선뜻 들어설 엄두도 내지 못하게끔 한다. 더욱이 문간에 서 있는 웨이터들도 상당한 연륜을 지닌 노장들이어서 괜스레 주눅이 들어선 살짝 들여다보는 데도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팔레르모 지역에는 아르헨티나가 넓은 나라라는 것을 증명하는 듯 널찍한 공원이 많다. 이탈리아광장을 중심으로 넓은 거리가 죽 뻗어 있다. '2월 3일 공원'은 4000㎢라는 가늠도 되지 않을 정도의 규모다. 동물원, 경마장, 인공호수 등 볼거리도 많아 시민들의 나들이 장소로 인기가 많다. 한번 둘러보는 데만도 엄청난 시간이 걸리므로 일정을 고려해서 움직여야 한다.


이탈리아 광장 주변에는 1902년에 만들어진 카를로스 타이스 식물원도 있는데, 그곳에 있는 온실은 1900년 파리 박람회에서 아르헨티나 전시관으로 쓰였던 것을 옮겨왔다고 한다. 일본 정원도 있다. 1967년 일본의 왕세자가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방문했을 때 일본인 교민단체가 시에 기증한 것으로 전형적 일본 양식을 볼 수 있다. 남미라는 장소를 감안하면 다소 색다르지만, 우리 눈에는 일본 냄새가 짙어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다.

라틴아메리카 미술관, 중남미 유명작가 작품 갖춰 


다음으로 찾아갈 만한 곳은 라틴아메리카 미술관(MALBA, Museo de Arte Latinoamericano de Buenos Aires)이다. 2001년 9월 아르헨티나의 재벌 에두아르도 콘스탄티니가 중남미의 현대 미술을 연구하고 보존하기 위해 설립한 곳으로 비영리재단이 운영하고 있다. 콘스탄티니 개인 소장품을 중심으로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멕시코), 페르난도 보테로(콜롬비아), 윌프레도 람(쿠바) 등 중남미 미술계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갖추고 있다. 또 근처에 있는 국립미술관도 빠뜨릴 수 없다. 독특한 분홍빛 건물이 눈길을 끈다. 입장료도 받지 않았다. 고야와 렘브란트, 고흐, 피카소 등 유럽 유명작가들 작품이 생각보다 많아 귀한 구경이 된다. 다만 전시 공간이 좁아 작품들을 빽빽하게 배치해 놓고 있어 관람하는 동안 조금 조심스러웠다. 

    
이쯤에서 자연히 보게 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명물이 있다. 드넓은 공원을 지나다 나시오네스 우니다스 광장(Plaza de los Naciones Unidas)으로 다가가면,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금속 꽃 플로라리스 헤네리카(Floralis Genérica)가 눈에 들어온다. 세계에서 가장 큰 꽃 조형물이자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새로운 상징물이 된 것으로 건축가 에두아르도 카탈라노(Eduardo Catalano)가 2002년에 만들었다. 스테인리스 스틸과 알루미늄을 사용해 6개의 꽃잎을 가진 세상에서 하나뿐인 이 꽃은 꽃잎 하나의 무게가 18t에 달하고 길이는 23m나 된다. 특히 아침이 되면 진짜 꽃처럼 봉오리를 벌리고 밤이면 닫는 움직이는 조각품으로 유명하다. 작가는 “모든 꽃의 종합이면서 매일 다시 피어나는 희망을 뜻한다”라고 제작 의도를 밝혔는데, 벌어진 꽃잎들이 조금씩 움직이는 듯이 보여 새로운 활기를 전해 받는 것 같기도 했다.

1882년부터 묘지로…에바 페론 등 유명인 묻혀


그곳에서 길을 건너 레콜레타(Cementerio de la Recoleta) 묘지로 간다. 원래는 1732년에 세워진 수도원의 정원이었으나 1882년부터 묘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아르헨티나 전 대통령들, 노벨상 수상자들, 작가, 배우, 운동선수 등 저명인사들이 누워 있다. 현재 약 4700개의 납골묘가 있는데, 94개는 국가 역사 유물로 지정되어 있다. 바로 이곳에 아르헨티나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대통령 부인 에비타가 있다. 사실 사망한 뒤 그녀의 시신은 복잡한 정세 탓에 국외로 떠돌다가 거의 20년이 지나서야 가족 두아르테(Duarte) 집안 묘지에 안치돼 영원한 평화에 들었다.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이 그 앞에 몰려 있는 것을 보면서 죽은 사람에 대한 올바른 평가 기준이 무엇인지 잠깐 생각하게 된다. 어쨌든 대도시 한가운데 상당한 크기의 묘지가 있고, 그곳을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모습과 2013년 CNN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묘지 열 곳 중 하나로 꼽았다는 이야기를 생각하면 여러 가지 상념을 불러오게 한다.

대형서점 엘 아테네오…오페라극장의 변신 


이제 분위기를 바꿔 서점으로 간다. 세계적으로 출판이 위기를 겪고 있고, 동네서점을 비롯해 서점들이 나날이 줄고 있다. 그래서인지 대형서점 엘 아테네오(El Ateneo)를 보자 반가운 마음이 먼저 앞섰다. 1919년 오페라극장으로 처음 문을 열었고, 1929년부터는 영화관으로 사용되다가 2000년에 다시 서점으로 변신했다. 2008년 영국의 <가디언>지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2위에 이름을 올렸다. 안으로 들어가면 그 크기에 사뭇 눈이 휘둥그레지고, 천장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는 유럽의 대성당에 들어선 듯 경건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벽 쪽에 줄지어 세워진 서가에는 정말 세상에 있는 모든 책이 다 꽂혀 있는 듯하다. 불행히도 한국어책은 없고, 스페인어책이 대부분이라 무슨 책인지 짐작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커피숍에 안쪽에 앉으면 책에 둘러싸인 채 고즈넉한 분위기에 취할 수 있다. 


▲ 엘 아테네오 서점


여기서 책과 관련해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1899~1986)를 기억해야 한다. 팔레르모에서 태어난 그는 1914년부터 1921년까지는 스위스, 스페인에서 살았으나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문학에 헌신하며 국립대학 영문학 교수와 국립도서관장을 지냈다. 하지만 갈수록 시력이 나빠져 나중에는 글 쓰는 것조차 주변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의 작품은 남미 특유의 환상적 리얼리즘을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로 표현함으로써 전 세계 문학 독자들을 홀렸다. 항상 지팡이를 짚고 다녔기에 지금도 도시 곳곳을 어슬렁거리고 있을 것 같다. 탱고 카페 토르토니(Tortoni)에는 그의 밀랍인형이 앉아 있고, 갈레리아스 파시피코 백화점에는 그의 이름을 명명한 보르헤스문화센터가 있다. 그의 흔적을 찾는 것 자체가 그의 소설을 읽는 한 방식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글·사진 남인복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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