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강간범'을 집행유예로 풀어주는 재판부

주영민 / 기사승인 : 2019-12-20 11:3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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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행 인정, 피해자 합의가 '선처' 이유 되나
높아진 국민 성인지감수성에 법원만 '퇴행'
회사내 성폭행 사실을 담은 글을 인터넷에 올려 논란이 일었던 H사 성폭행 사건 가해자가 최근(19일) 열린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1심에서 징역 3년의 실형을 받았던 터라 형량이 더 무거워졌으면 무거워졌지, 풀려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성범죄에 대한 친고죄(피해자가 처벌을 원해야 처벌 가능)가 폐지되고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확산으로 국민의 성인지감수성이 최고조에 이른 현재에도 사법부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

▲ UPI뉴스 자료사진

사법부의 성인지감수성 논란은 비서 폭행으로 1심에서 무죄를 받은 안희정 전 충남지사 사건으로 증폭된 바 있다.

항소심과 상고심의 판단이 유죄로 나오면서 일단락 됐지만, 재판과정에서 보인 사법부의 성범죄에 대한 인식은 많은 사람들로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했다.

남성 중심적인 한국 사회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에서 법원은 '피해자다운' 피해자가 명쾌하게 규정되길 원한다.

'피해자답지 않다'는 이유로 피해자의 진술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는 말이다.

재판부는 피해자에게 '왜 저항하지 않았냐'고 묻는다. 정상적인 판단 능력을 갖춘 성인이라면 피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는 이유에서다.

재판부가 판단하는 성폭력 피해자의 모습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피해자와 극단적으로 무기력한 피해자. 이 두 가지에서 벗어난 피해자는 피해자답지 않기 때문에 피해자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이는 여성의 현실과 괴리된 인식이다. 피해자는 일률적인 반응이나 대처 방식을 보이지 않는다.

처한 상황과 사고가 발생한 맥락에 따라 여성들은 다르게 행동한다. 이는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H사 성폭행과 관련된 항소심 판결은 결국 피해자의 생존 전략을 재판부가 외면한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재판부는 "1심부터 2심 첫 공판까지 범행을 부인하던 가해자가 2회 기일에 이르러 범행을 인정했다"며 "피해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점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본인이 구속됐지만 피해자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에 거짓이 없었다고 판단했다"고 판시했다.

이어 "2심에 이르러 피해자와 합의해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며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도대체 이런 이유로 '강간범'에게 '선처'를 내린다는 게 일반상식에 부합하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피해자와 합의해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점을 고려했다는 게 사법부의 판단이지만, 피해자의 속내는 달랐다.

피해자가 모 언론사에 보낸 손편지 내용에는 "살기 위해서 합의를 했다"는 심경이 담겼다.

피해자는 "사과는 못 받았지만 항소심에서도 무죄를 주장하던 가해자가 합의를 해주면 모두 인정하겠다고 했다"며 "저는 제 존재가 남아있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사법부의 성인지감수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성범죄에 있어서 피해자의 입장에서 판단하기보다는 가해자에 대한 훈계와 교화를 강조하는 사법부의 행태가 여전하다는 것이다.

조상희 법무법인 연송 변호사는 "사법부가 성범죄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을 할 수 있을 만큼 피해자의 마음을 헤아린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며 "가해자에게 훈계해 교화시키는 것에 대한 일종의 우월감이 있지 않았나 싶다"고 했다.

이어 "이번 H사 성범죄 사건의 항소심 판단은 성범죄를 바라보는 사법부의 시각을 여실히 드러낸 사례다"며 "말로만 성인지감수성을 높이겠다고 할 게 아니라, 성범죄 처벌에 대한 진정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했다.

UPI뉴스 / 주영민 기자 cym@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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