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성범죄 공분 치솟는데 판사들은 왜 관대할까

주영민 / 기사승인 : 2020-04-21 16:5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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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번방 공분에 양형위, 처벌 수준 높이기로 했지만
판사가 제대로 적용하지 않으면 '무용지물' 지적도
시대적 요구 따라가지 못하는 판사들 '변화' 절실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 사람이 죽은 뒤에 약을 짓는다는 뜻으로 일을 그르친 뒤 아무리 뉘우쳐야 이미 늦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n번방·박사방 사건으로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커지면서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관련 범죄 처벌 수준을 기존 판례보다 더 높이기로 했다.

하지만 해당 사건들의 근본 배경에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새 기준 마련이 너무 늦은 게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

먼저 n번방 운영자 중 한 명인 대화명 켈리 신모(32) 씨의 경우 최근 항소를 취하하면서 1심에서 선고한 징역 1년형이 확정됐다.

앞서 검찰 측이 입증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항소를 하지 않아서 발생한 사안이지만, 강력하게 처벌하고 기소를 유지할 수 있는 양형기준이 있었더라면 이러한 솜방망이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이번에 양형기준이 강화된다고 하더라도 '박사방' 사건을 일으킨 '박사' 조주빈(25), '부따' 강훈(18) 등에게 적용할 수 없어 재판부의 판단에 따라 처벌 수위가 달라질 공산이 크다.

양형위 운영규정 20조는 효력 발생 시기를 관보에 게재된 이후 공소가 제기된 범죄에 적용한다고 규정하고 있어서다. 양형기준 강화가 사후약방문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는 이유다.

특히 양형위가 "디지털 성범죄와 관련된 엄중한 현실을 인식하고, 기존 판례에서 선고된 형량보다 높은 양형기준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판단에 따라 기준을 제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해당 기준이 국민의 법감정을 충족시킬 수 있을지 미지수다.

피해자가 13세 미만이면 양형기준을 높이겠다는 게 양형위의 판단이다. 현재 아동·청소년 대상 강간죄의 양형기준은 피해자가 13세 미만이면 징역 8~12년으로 가중 설정돼 있는데 이를 더 높이겠다는 것이다.

양형위는 또 형량 감경요소로 아동 피해자의 처벌 불원이나 의사능력이 있는 피해 아동의 승낙 등이 포함되는 게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도 중점적으로 논의했다. 양형기준을 높이고 감경요소를 줄여 강력한 처벌이 이뤄지게 하겠다는 의도가 엿보인다.

문제는 그동안 기존 양형기준을 충족한 판결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 비춰 볼 때 사회변화에 둔감한 판사들이 바뀌지 않는다면 양형기준은 말 그대로 기준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양형위에 따르면 2014년부터 2018년까지 청소년성보호법 11조 위반으로 처벌받은 50건 중 실형을 선고받은 것은 6건(12%)에 불과했다. 나머지 44건은 집행유예를 받았다.

아동·청소년 이용 음란물을 제작·수입·수출한 자는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도록 규정된 해당 법령에 비춰 볼 때 터무니없는 판결이다.

이는 향후 양형기준을 높이더라도 판사가 이를 제대로 적용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형량 자체도 국민 법감정과 동떨어져 있었다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인터넷상에서 디지털 성범죄 양형기준 강화를 검색하면 '양형 변경을 일으킨 사건만큼은 소급적용하라', '피해자별로 형량을 나눠 판단해 이를 합산해서 판결하라', '사회적 관심이 있을 때 잠깐 강력한 판결을 내리고, 이후에는 다시 집행유예, 사법부는 늘 도돌이표' 등 댓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검찰이 아무리 구형량을 높이고 구속 수사를 해도 판사가 최종 선고에서 솜방망이 판결을 내린다면 이처럼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국민 법감정이 사법부에 대한 공분으로 바뀌는 것이 시간 문제에 불과해 보이는 이유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판사들이 아동·청소년 대상 성착취 영상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를 무겁게 인식하고 변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는 것이다. 

조상희 법무법인 연송 변호사는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양형기준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판사들이 해당 기준에 맞춰 제대로 판결을 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며 "국민의 법감정에 따라 휘둘린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세상이 바뀌고 범죄가 더 악랄해지고 지능화하는 만큼, 판사들도 변화해야 한다는 인식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 주영민 사회부 기자

UPI뉴스 / 주영민 기자 cym@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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