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이 세상의 어머니들아, 아니라고 말하라!"

조용호 / 기사승인 : 2020-04-29 14: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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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보르헤르트 전집 '사랑스러운 푸른 잿빛 밤'
'이별 없는 세대' 요절 독일 작가의 흩어진 유작들
바이러스가 죽음 몰고 다니는 세태에 다시 보는 외침

인류는 전쟁도 아닌 평화 시에 시체를 보관할 곳이 모자라 임시로 외딴 섬에 매장하는 사태까지 연출하는 상황을 목격하고 있다. 그것도 세계 최강의 국가라는 곳의 심장부에서. 백번 양보해서 바이러스나 재난으로 인한 죽음의 양산은 불가항력 측면이라도 있지만, 인간들 자신이 서로 죽고 죽이는 재앙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2차 세계대전으로 희생된 민간인을 포함한 사상자는 최대 7000만 명까지 추산된다. 도처에 주검이 널려 삶과 죽음이 무감각해지는 지옥이 따로 없다. 이 살육의 구렁텅이에 끌려가 한창 감수성 예민한 청춘기를 보낸 젊은이가 삶과 죽음이 어떻게 다른지, 이런 세상에서 왜 살아야 하는지 묻는 절규에, 자고 있던 신은 어떤 응답을 했을까.

▲2차세계대전에 징집돼 참혹한 전쟁터에서 이십대 초반을 보낸 뒤 병상에서 2년 동안 절규하듯 집필하다 요절한 독일 작가 볼프강 보르헤르트. 그의 전모를 다시 살필 수 있는 전집이 출간됐다. [문학과지성사 제공]

 

"사람들은 죽음을 그냥 지나쳐버려, 부주의하게, 체념하여, 둔감하게, 구역질을 느끼면서, 그리고 무관심하게, 무관심하게, 너무나 무관심하게! 그리고 죽은 자는 꿈속에서 깊이 절감하지, 자신의 죽음이 삶과 똑같다는 걸. 무의미하고, 보잘것없고, 잿빛이란 걸. 그런데도 너는― 너는 나더러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거야! 어째서? 누굴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나는 죽을 권리도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권리도 없어? 계속 살해당하고 살인해야 하는 거야? 나더러 어쩌라고? 내가 무슨 힘으로 살아? 누구와? 무엇을 위해서? 이놈의 세상에서 우리는 대체 어디로 가야 해!"('문밖에서')

 

볼프강 보르헤르트(1921~1947)는 스무 살에 징집돼 전장과 군교도소를 오가다 4년 만에 고향에 돌아와, 2년 동안 글을 쓰다가 스물여섯 살에 세상을 떠났다. 글을 쓴 기간은 짧았지만 병중에 소진돼가는 생명을 의식하며 절규하듯 써낸 작품들은 전후 독일은 물론 세계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어 세계 문학의 반열에 서 있다. 국내에도 1975년 '이별 없는 세대'를 표제로 독문학자 김주연이 시와 단편들을 묶어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최근 출간된 보르헤르트전집 개정증보판(2007년)을 원본으로 삼은 국내 첫 번역서 '사랑스러운 푸른 잿빛 밤'(박규호 옮김·문학과지성사)은 그동안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던 보르헤르트의 여러 단편과 초기 시들을 국내 독자들에게 처음으로 소개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대산세계문학총서 시리즈로 발간된 이번 전집의 역자 박규호는 "개정증보판 새 전집은 작가의 육필 원본과 초판본들을 비판적으로 다시 검토하고, 초판에서 제거된 구절들을 복원했다"면서 "구전집에 빠진 다수의 초기 시들과 단편들 그리고 유고시집 '슬픈 제라늄'에 실린 시들을 추가로 수록해 전집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였다"고 평가한다.


보르헤르트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예민한 감수성으로 연극에 심취했던 청년이었다. 꿈꾸던 직업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했지만 이내 군에 징집돼 모스크바 외곽 스몰렌스크 전선에 배치돼 영하 40도를 오르내리는 전장에서 수많은 죽음과 죽임을 겪어야 했다. 자해 혐의로 군 교도소 수감, 전선에 배치되는 조건으로 다시 전쟁터, 나치를 조롱했다는 죄목으로 다시 수감, 석방, 프랑스에서 연합군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해 함부르크까지 걸어서 귀향했다. 1946년 늦가을 단 며칠 만에 병상에서 완성한 희곡 '문밖에서'는 '폐허의 젊은이들을 위한 장송곡'으로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한 사람이 있어, 그리고 그 사람이 독일로 돌아와, 그리고 추위에 떨어. 굶주리고 절뚝거리며 돌아다녀야 해! 한 남자가 독일로 와! 집에 와보니 자기 침대는 다른 사람 차지가 되어 있는 거야. 문은 닫히고 그는 바깥에 서 있어. …아무도 없어. 여기 아래쪽의 인간들이건 저 위쪽의 신이건 아무도 듣는 이는 없어. …그 노인은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자신을 신이라고 부르는 그 노인은? 당신들 다 어디로 가버린 거야? 왜 아무 말도 없냐고! 대답 좀 해! 당신들 왜 말이 없는 거야? 왜? 아무도 대답 안 할 거야? 아무도 대답 안 하냐고!!! 아무도, 대체 아무도 대답을 안 할 거야???"

 

'문밖에서'로 이름을 알린 보르헤르트는 이듬해 4월 첫 산문집 '민들레'를 펴냈다. 전쟁 중 군교도소에서 만난 민들레에서 위안을 얻는 젊은 병사의 심정이 처연하게 녹아 있다. 한국에서도 김지하 신영복 등이 감옥에서 묘사한 민들레도 1970년대 소개된 보르헤르트 세례에 빚지고 있을 법하다.

 

"심드렁하고 회한에 찬 젊은이가 432호 감방의 높이 난 창 아래에서 고독한 두 손으로 작고 노란 꽃 한 송이를 가녀린 햇살 속에 보듬고 있다. 지극히 평범한 민들레 한 송이. 이윽고 그는 민들레를 화약, 향수와 휘발유, 독주와 립스틱 냄새에 익숙한 자신의 굶주린 코로 가져간다. 벌써 몇 달째 간이침대의 나무와 먼지와 식은땀 냄새밖에 맡지 못한 코였다. 그는 작고 노란 꽃으로부터 그 정수를 탐욕스럽게 자기 안으로 빨아들인다. 그에겐 오직 코밖에 없는 듯하다. 그는 더 이상 이 공간을 견딜 수 없어 두 눈을 감으며 놀라워했다. 네게선 흙냄새가 나는구나. 태양과 바다와 꿀 냄새가 나는구나, 너 어여쁜 생명아!"


국내에 알려진 보르헤르트 대표작은 '이별 없는 세대'이다. "우리는 애착도 없고 깊이도 없는 세대다. 우리에게 깊이란 
끝 모를 나락이다. 우리는 행복도 없고 이별도 없는 세대다. 우리의 태양은 희미하고 사랑은 잔혹하고 젊음은 젊음을 잃었다. 우리는 신이 부재하는 시대다." 이별조차 사치스러운 현실이라는 사실을 무감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희망 없는 세대. 국내에서 당대 젊은이들의 유행어가 되다시피 회자된 '이별 없는 세대'에 대해 독문학자 김주연은 "6.25 전쟁이 끝난 지 20년이 넘은 시절이었지만 4.19의 피가 여전히 남아 있었고, 무엇보다 당시는 저 무시무시한 '유신' 시대"였다면서 "권력자에 반대하는 한마디의 말이 생명까지 앗아가는 우리의 상황은 보르헤르트가 똑같은 이유로 생명을 잃을 뻔했던 독일의 현실과 일모(一毛)의 차이 없이 같았기 때문"이었다고 술회한다.

 

이번 전집에 소개된 '여기저기 남겨진 유작 단편소설'을 보면 보르헤르트의 낭만적 감성도 읽혀 참혹한 전쟁 체험과 선명한 대비를 이룬다. 표제작 '사랑스러운 푸른 잿빛 밤'은 세상이 아무리 암울해도 청춘의 뜨거운 피와 열정만은 누구도, 어떤 재앙도 제어할 수 없음을 웅변한다.

 

"밤이 모든 것을 잿빛으로 물들인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밤은 형언할 수 없고 따라 할 수 없는 푸른 잿빛이다. 고양이들을 위한 잿빛과 여인들을 위한 푸른 빛. …밤비 소리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가 있을까? 밤에 내리는 비처럼 그토록 은밀하고, 그토록 당연하고, 그토록 신비로우면서 수다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우리는 귀가 너무 무뎌져서 전차 경적 소리, 대포 소리, 교향곡 연주 소리에만 반응하는 건가? 밤에 내리며 도로와 사르르 담소를 나누고, 창문과 지붕 기와에 음탕한 속삭임을 던지고, 수백만 마리의 모기가 숨어 있는 잎사귀에 나지막이 북을 두드리고, 얇은 여름옷 사이로 우리의 어깨를 두드리고, 가벼운 징 소리와 함께 졸졸 물줄기가 되어 흐르는 수천 개의 빗방울이 만들어내는 교향악은 듣지 못하는 걸까?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시끄러운 소리 말고는 더 이상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걸까?"

 

겨우 열일곱 살 여자는 들떠서 외친다. "비는 천사야! 엄마는 내가 화장한 걸 알았다면 난리를 쳤을 거야.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인데 우린 둘 다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그래, 비는 정말 천사야!" 이 낭만을, 이 비의 달콤함을 느끼고 묘사하는 보르헤르트를 떠올리면 그가 겪은 참혹이 더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번에 소개된 유작들에는 보르헤르트가 침대에서 겨우 손으로 글을 쓰면 아버지가 옆에서 타이핑을 해주는 장면도 보인다. 그는 아버지가 "내 머리통이 터져버릴까봐 두려워서 자신이 환기장치 노릇을 하려 한다"고 썼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망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미국 뉴욕 하트아일랜드에서 시신이 담긴 관을 가매장하고 있다. 대규모 죽음은 전쟁의 악몽을 되살린다. [AP 뉴시스]

 

"내 옆 책상에서 쿵쿵 망치질 중이다. 몇 시간째. 책상 앞 의자에 90파운드가 앉아 책상 위에 있는 45파운드를 이리저리 망치질한다. 책상 위 45파운드, 그것은 내 뚱뚱하고 무거운 타자기다. 책상 앞 90파운드, 그것은 가볍고 여윈 내 아버지다. 아버지는 몇 시간째 타자기에서 광기의 리듬을 쪼개고 있다. 틱틱거리는 소리는 모두 시한폭탄소리다. 그리고 그 시한폭탄은 내 머리통이다."('교수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중환자 보르헤르트는 패전국 독일의 열악한 상황에서 더 이상 병을 치료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친구들이 스위스로 요양을 보내기로 했지만, 요양원까지 당도하지 못한 채 스위스 국경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문밖에서'가 고향 함부르크 극장에서 초연되기 하루 전날이었다. 보르헤르트는 죽기 며칠 전 유언 같은 호소문을 남겼다.

 

"너희, 기계 앞에서 일하고 공장에서 일하는 남자들아. 그들이 너희에게 내일 더 이상 수도관과 냄비 말고 철모와 기관총을 만들라고 명령하면, 그러면 결론은 오직 하나,/ 아니라고 말하라!/ (……) / 너희, 노르망디와 우크라이나의 어머니들아, 너희, 샌프란시스코와 런던의 어머니들아, 너희, 미시시피강 변의 어머니들아, 너희, 나폴리와 함부르크와 카이로와 오슬로의 어머니들아, 지구 모든 곳의 어머니들아, 이 세상의 어머니들아, 그들이 너희에게 내일 아이를 낳으라고, 야전병원에서 일할 간호사와 새 전쟁터에서 싸울 신병을 낳으라고 명령하면, 이 세상의 어머니들아, 그러면 결론은 오직 하나, / 아니라고 말하라! 어머니들아, 아니라고 말하라!"('그러면 결론은 오직 하나!')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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