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김훈 "말들의 눈동자에 저무는 빛이 번득였다"

조용호 / 기사승인 : 2020-05-07 11: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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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번째 장편, 판타지 '달 너머로 달리는 말'
시대와 공간을 특정하지 않은 시원의 무대
인간의 야만에 저항하는 비장한 산문서사
"문장은 전투, 표현은 양보할 수 없는 것"

소설가 김훈(72)이 신작 장편 '달 너머로 달리는 말'을 선보였다. 특정 시대와 공간을 넘어선 첫 판타지 소설이자 열 번째 장편이다. 말[馬]이 사유하고 행동하는 캐릭터로 사람과 동등하게 등장해 사람들 세상의 야만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사람들의 무모한 싸움에 말들은 동원되지만 어느 편도 아니다.

▲ 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인간의 야만을 부각시킨 소설가 김훈. 그는 "말은 문명과 야만의 동반자라고 생각한다"면서 "인간과의 동반자로서, 말의 생각이 무엇일지 궁금했다"고 밝혔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산맥 위로 초승달이 오르면, 말 무리는 달 쪽으로 달려갔다. 밤은 파랬고, 신생(新生)하는 달의 풋내가 초원에 가득 찼다. 말들은 젖은 콧구멍을 벌름거려서 달 냄새를 빨아들였고, 초승달은 말의 힘과 넋을 달 쪽으로 끌어당겼다. 초승달이 뜨면 젊은 수말들은 몸을 떨면서 정액을 흘렸다."

 

초승달을 향해 달리는 신월마(新月馬)의 고향은 백산의 북쪽 끝, 천년 만년 눈이 녹지 않는 땅이다. 몸집이 작고 허파가 크고 심장이 야무져서 적게 먹고 오래 달렸다. 이 말들은 사람 사는 마을의 고기 굽는 연기와 누린내를 싫어해서 사람에게 가까이 오지 않았다. 신월마의 핏줄을 이어받은 '토하'(吐霞)는 이름 그대로 '안개와 무지개를 뿜어내는 말'이다. '단'을 정벌하러 나선 '초'의 수장 '표'가 타는 말이다.

 

"해가 수평선 쪽으로 내려앉고 바다와 하늘이 붉어지면, 비혈마들은 저무는 해를 향해서 달려갔다. 노을은 빛 속에 어둠을, 어둠 속에 빛을 품으면서 어두워졌다. 비혈마들은 어둠에 잠겨가는 마지막 빛을 향해 더욱 빨리 달렸다. 소멸하는 빛에 비혈마들은 조바심쳤다. 말들의 눈동자에 저무는 빛이 번득였다."

 

숨이 턱이 차게 저무는 해를 향해 달리면 위로 올라온 피가 목덜미에서 터져 소멸하는 빛 속으로 분사된다. 피가 분사될 때 이마에 박힌 흰 점에서 빛들이 흔들리는 이 말의 혈통은 '비혈마'(飛血馬). 사막이 끝나면 다시 열리는 초원을 지나야 당도하는 바닷가가 고향이다. 수비대 마구간에서 태어난 비혈마 '야백'(夜白)은 '단'의 군장 '황'이 타는 말이다.

 

'나하'라는 강을 경계로 북쪽에는 '초'가, 남쪽에는 '단'이 포진한 김훈의 '판타지 공간'이다. 유목의 특성을 지닌 '초'는 땅 위에 금을 긋지 않고 정주하지 않는다. 노인들은 스스로 소멸하고 문자는 부질없이 혼돈만 야기하는 것이라 여긴다. 이 집단의 왕 '목'은 아들 '표'에게 강을 건너가 '단'의 돌무더기를 모두 치워버릴 것을 명하고 자신은 이 생에서 이루지 못한 '금 없는 세상'을 향해 사라진다. '단'은 농경 정착 생활의 특성을 지닌 집단이다. 성을 쌓고 농사를 지으며 문자를 숭상하고 조상을 섬긴다. '표'가 개 떼를 앞세워 강을 건너 '단'을 공격하면서 무참한 싸움은 소설 내내 전개된다.

 

'야백'과 '토하'는 이 싸움터에 주인을 태우고 앞장서 나가지만 싸움은 그들과는 무관한 것이다. '야백'이 태우고 다니던 군장 '황'은 패배의 대가로 스스로 발가벗은 채 투석기에 올라 적진을 향해 발사돼 죽음을 택했다. 야백은 벽에 입을 부딪쳐 이빨을 부수고 재갈을 벗어던진 후 탈출한다. 그가 강가에서 쉬고 있는 '초'의 말들 사이로 들어가 '토하'를 만나 흘레를 한다.

 

"토하의 몸속은 살들이 주름져서 산맥처럼 출렁거렸다. 살의 산맥들은 첩첩 연봉을 이루며 깊고 어두운 안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야백의 생식기는 그 산줄기들을 차례로 타 넘었다. 살의 산맥들은 꿈틀거리며 요동쳤다. 야백의 생식기는 그 산줄기의 끝에서 진저리치며 폭발했다. 토하는 아침 해 쪽으로 입을 벌리며 안개를 토했다."

 

그렇게 토하의 몸에 비혈의 씨앗이 심어지지만, 질책을 두려워한 마의(馬醫)들이 독이 든 풀을 먹이에 섞어 유산을 시킨다. 그 시절 사람들은 몸에서 흘러나온 핏덩이를, 흘러나온 목숨이라는 뜻으로 유생(流生)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말들의 일을 모른다. 그저 죽자사자 싸울 뿐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싸우고자 하는 이는 '초'나 '단'의 수장일 뿐, 백성들은 동원된 말의 처지와 기실 다를 바 없다.

 

"싸우는 자들은 어느 쪽이 이기고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사람과 개들이 악악 소리를 지르면서 찌르고 베고 물어뜯었다. 피에 젖은 개들이 목을 세우고 하늘을 향해 우우우 하고 울었다. 개들의 눈에서 푸른 인광이 번쩍였다."

▲ 김훈은 "단어들에 묻어 있는 사회적, 역사적 고정관념들 때문에 이번 소설에서 이것들을 털어내 버리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다"면서 "언어는 경험의 소산이고, 경험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번 작품을 쓰면서  깨달았다"고 밝혔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단의 군장 황은 부상자들 가운데 음식을 삼킬 수 있는 자들을 따로 모아 마지막 한 끼를 베푼다. 죽은 군병들의 창 자루를 모아 불을 때서 초군의 죽은 개들로 끓인 국을 마신 부상자들은 스스로 걸어서 파묻힐 구덩이로 들어갔다. 표의 군장들은 초원에 널린 시체를 거두어서 옹기에 넣고 고았는데, 끌려온 단의 백성들이 화덕에 불을 땠다. 한나절 끓여서 식힌 국물 위에 낀 두텁고 찰진 기름에 군병들이 마른풀을 적신 후 다시 말려서 한 단씩 묶었다. '사람의 죽음은 짐승의 죽음과 다르지 않았다.'

 

"죽은 자들의 범접할 수 없는 침묵 속에는 산 자를 압도하는 위엄의 후광이 빛나는 것을 황은 일찍부터 알았다. 산 자는 죽은 자를 이길 수 없었다. 죽은 자는 이미 죽었기에 죽일 수가 없었고, 죽어 널브러지고 문드러진 자세로 산 자를 조롱했다. 죽은 자는 산 자의 영광에 침을 뱉고 있었다. 적병과 아군의 시체가 뒤엉켰지만, 죽은 자에게는 산 자의 칼이 닿지 않았다."

 

적막이 흐르는 김훈의 문체는 비감하다. 구체적인 시대나 배경으로부터 자유로운 판타지의 공간이어서 그런지 수식어가 절제된 사실적 묘사에도, 오히려 더 화려해진 느낌이다. 도저한 허무로 마냥 빠져들지 않고 적막한 가운데에도 선연한 울림을 주는 저변에는 김훈의 '연민'이 있다. 이 연민이 냉정한 묘사를 견디는 힘이다.

 

김훈 문체는 이번 소설에서 특히 도드라진다. 비장한 서사 산문시 같다. 비혈마 '야백'과 신월마 '토하'의 한살이는 사람의 잔혹한 행태를 부각시키는, 자연과 동화되지 못하는 일그러진 그들을 선명하게 음각시킨다. 싸우는 사람만 나오는 건 아니다. 신월마와 교접한, 처음으로 말 잔등에 오른 '추'의 딸  '요'가 백산으로 들어가 동물과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신으로 부각되는 설화도 나온다. 순리에 따라 땅을 경작하며 금을 긋지 않고도 정착생활을 하는 '월'의 사람들도 있다.

▲ 김훈은 "세상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서식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이 책은 그 답답함의 소산"이라고 책 뒤에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지난달 전자책 구독서비스 '밀리의 서재' 회원들에게 먼저 공개된 이 작품은 6월에 일반서점에서 만날 수 있다. 회원들의 가상공간 '챗북'에서 김훈은 "아무런 역사적 시대나 현실을 설정하고 있지 않은 이번 소설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생각한 것은 문명과 야만의 구획이 형성되기 이전의 시원적 삶의 모습"이라며 "지금도 여전한 문명과 야만의 뒤엉킴에 저항하는 생명의 힘을 그리려고 했다"고 밝혔다. 그는 역사적 사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이유에 대해서는 "인간이 경험하지 못했거나, 기록하지 않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상상과 혼란을 전개하자는 것이었다"면서 "언어는 경험의 소산이고, 경험의 지배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번 작품을 쓰면서 깨달았다"고 덧붙였다.

 

"말은 힘이 강하고, 성품은 강인합니다. 외모는 무척 아름답고요. 말은 문명과 야만의 동반자라고 생각합니다. 인간과의 동반자로서, 말의 생각이 무엇일지 궁금했습니다. 인간에게서 탈출한 말의 자유를 생각하며 썼습니다."

 

문명과 야만에 관한 화두는 김훈의 지속적인 관심사다. 그는 우리 당대에도 야만성이 있지만 인간은 자기 당대의 야만성을 보기는 쉽지 않다고 여긴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우리 시대의 야만성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역설한 바 있다. 약육강식이 시장의 정의라고 생각하는 야만을 일상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실을 예로 들었다.  판타지와 달리 시대와 공간이 뚜렷한 전작 '공터에서'는 피란지 부산의 빨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빨래꾼들은 모래에 반쯤 묻은 드럼통에 강물을 채우고 빨래를 담갔다. 잿물을 풀고 막대기로 저으면 핏물이 우러나왔다. 산악 부대의 피와 해안 부대의 피, 중공군의 피와 인민군의 피, 국군의 피와 학도병의 피, 상등병의 피와 대위의 피가 섞였다. 핏물에서 비린내가 났다." 가까운 현대사의 야만은 먼 시원의 초원에서 벌어진 야만과 얼마나 다른가.

 

칠순에 접어들어 처음 펴낸 이 장편은 전작들의 관심사를 심화하고, 오래 연필 끝을 단련시켜 매조진 문체를 판타지 공간에 한껏 풀어낸 듯 보인다. 김훈은 "문장은 전투와 같고 표현은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면서 "여생의 시간을 아껴 사랑과 희망, 인간의 영성, 내 이웃들의 슬픔과 기쁨, 살아있는 것들의 표정, 이런 것들에 대해 말하고 싶다"고 말했다.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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