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정영진을 '여성 혐오자'로 둔갑시킨 기자들

김현민 / 기사승인 : 2020-05-11 13:4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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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검 순위 이름 오르자 본질 호도한 기사 확산
발언 의도보다 자극적 표현으로 꼬투리 잡기
진위 확인 무시하는 '떼거리즘 언론' 자성해야
방송인 정영진이 지상파 라디오 DJ 자리에 앉기도 전에 하차했다.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이만큼 황당한 촌극도 없다.

문제의 시발점은 정영진이 네이버 실시간 검색어 순위(이하 실검) 상위권에 오르면서 함께 올라온 기사들이다. 정영진이 과거 출연한 프로그램에서 여성 혐오 발언을 해 논란이 된 적이 있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지난 6일 오전 더팩트는 MBC 표준FM '강석, 김혜영의 싱글벙글 쇼'에서 강석, 김혜영이 하차한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정영진과 배기성이 후임으로 DJ를 맡게 됐다고 보도했다. 같은 시각 MBC 역시 보도자료를 통해 라디오 프로그램 봄 개편을 알리면서 여러 프로그램의 새 DJ를 공개했다. 여기까진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정영진이 네이버 실검 상위권에 오르고 난 뒤 시작됐다. 다시 강조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후 실검에 오른 것이 아니라 실검에 오른 후 문제가 일어났다. 멀쩡한 정영진이 여성 혐오자로 둔갑하기까지는 단 몇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매일경제 스타투데이가 그 시발점이다. 해당 매체는 이날 오후 ''싱글벙글쇼' 새 DJ 정영진, 누구? #시사평론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해당 기사는 정영진의 이력을 소개했고 말미에 "정영진은 과거 '까칠남녀'에서 부적절한 발언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면서 정영진이 했던 발언 몇 개를 실었다.

▲ 매일경제 스타투데이를 비롯한 다수의 매체는 2017년 8월 방송된 EBS '까칠남녀'에서 정영진이 했던 발언이 논란을 빚었다는 주장의 기사를 지난 6일 쏟아냈다. [EBS '까칠남녀' 캡처]

이 기사 같지 않은 기사의 파급력은 가공할 만했다. 53개의 매체가 해당 기사를 재탕하거나 유사하게 변형했다.

그 53개의 매체를 보도 시간순으로 나열하자면 뷰어스, 스포츠W, MBN, 머니S, 경향신문, 스포츠경향, 머니투데이, 세계일보, 뉴스컬처, 중앙일보, 스포츠서울, 스포티비뉴스, 쿠키뉴스, 한경닷컴, 부산일보, 한국일보, 위키트리, 조선일보, 중앙일보, 뉴스인사이드, 국민일보, 월간조선, 뉴스1, 이데일리, 서울와이어, 아주경제, 아시아경제, 조이뉴스24, 스포츠월드, 톱스타뉴스, 마이데일리, 데일리한국, 스포츠Q, 전기신문, 시선뉴스, 스포츠한국, 조선비즈, 헤럴드경제, 뉴스웍스, 연합뉴스, 싱글리스트, 동아일보, 노컷뉴스, 여성신문, 허프포스트코리아, 머니투데이, 더셀럽, 금강일보, CNB저널, 매일경제, MK스포츠, 한국경제TV, 데일리안이다.

EBS '까칠남녀'라는 프로그램의 특성을 알면 논란이라고 우긴 것이 발언자의 의도를 외면한 채 본질을 호도한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해당 프로그램은 젠더 이슈에 관해 각자 다른 입장을 가진 출연진이 모여 토론하고 생각을 공유하는 교양 프로그램이다.

매일경제 스타투데이는 정영진이 "남성이 여성에게 돈을 쓰는 비용이 스킨십과 이어진다"고 말했다며 여성을 재력으로 살 수 있는 존재로 비하했다는 지적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다른 매체 역시 그가 "남성들이 주로 데이트 비용을 지불하고 이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여성들의 태도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매춘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 부분을 지적했다.

앞뒤 대화 맥락을 배재한 채 자극적으로 느낄 수 있는 발언만 발췌해서 보면 정영진은 세상 비뚤어지고 불만이 가득 찬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

프로그램의 특성, 발언자의 취지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특정 단어를 꼬투리 잡아 '여성 혐오 발언'이라는 프레임을 씌운 것은 저열하고 수준 낮은 관심 끌기다. 기자가 한번 더 생각했다면 정영진이 어떤 사고를 가진 사람인지 파악하고 기사를 썼을 것이다.

정영진은 여성들이 스스로 성차별 피해자임을 주장하면서 보여주는 다양한 모순을 지적해왔다. 그러면서 남성에게 가해지는 역차별을 짚는 등 합리적인 주관을 보여주며 남녀 불문한 지지를 받아왔다.

아울러 방송인이자 시사평론가로서 수년간 다양한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쌓았다. 그의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의사 표현 방식은 여러 차례 토론 프로그램에서 빛을 발했다.

특히 지난해 2월 출연한 MBC '100분 토론'에서 이준석 미래통합당 최고위원과 함께 여성 할당제의 문제를 지적한 장면은 화제가 됐다. 당시 정영진과 이 최고위원은 객관적인 데이터를 비롯한 명확한 근거와 논리를 내세웠고 상대 패널로 출연한 김지예 변호사, 최태섭 작가는 그러지 못해 압도당했다.

이번 촌극에서 또 하나 아쉬운 것은 '싱글벙글 쇼' 제작진의 판단이다. 역사와 전통, 탄탄한 지지층까지 보유한 프로그램의 DJ를 굳이 교체한 것부터가 긁어 부스럼이다.

제작진이 소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택한 것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이었다. 무책임하다. 어떤 출연자든 상처받고 싶지 않다면 이런 제작진을 신뢰해선 안 된다.

▲ 김현민 연예 담당 기자

UPI뉴스 / 김현민 기자 khm@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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