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성범죄 피해자와 합의했다고 형량 절반 감형?

주영민 / 기사승인 : 2020-05-13 17: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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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합의' '진지한 반성'이 감형 사유
국민 법감정 무시하는 재판부 판결 여전
술에 취한 여성을 집단 성폭행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가수 정준영(31)과 최종훈(30)의 항소심 형량이 1심에 비해 낮아진 배경에는 성범죄를 바라보는 변하지 않는 사법부의 시선이 깔려있다.

심신미약·음주상태·초범·대학생 등 성범죄 재판에서 판사가 가해자의 감형을 사유로 들먹이는 단어들은 빠졌지만, '피해자와의 합의', '진지한 반성'이라는 회심의 카드가 이들의 항소심 형량을 많게는 절반가량 줄게 했다.

최근 'n번방'과 '박사방' 사건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커지면서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양형기준을 높이는 등 '엄벌'을 예고했다.

하지만, 집단 성폭행은 물론 자신들의 소셜미디어(SNS)에 성범죄 동영상 등을 돌려본 이들이 항소심에서 감형을 받는 판례가 또 나오면서 국민 법 감정과 사법부 판단의 괴리를 다시 한번 확인한 셈이 됐다.

1심에서 징역 5년을 받은 최종훈은 항소심에서 정확하게 절반인 징역 2년 6개월로 감형받았다.

앞서 지난 7일 선고 공판을 연기하면서 해당 사건을 담당한 서울고법 형사12부(윤종구 부장판사)는 여론을 의식한 듯 '피해자와의 합의 여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재판부는 정준영 등이 '합의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기일 연기 신청을 하자, 이를 받아 들이면서도 "과거에는 합의가 상당히 중요한 양형 인자였지만, 최근 양형기준에서는 합의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항소심 선고 결과는 합의 여부를 충실히 반영했다.

재판부는 최종훈에 대해 "피해자의 합의는 항소심에서 일부 반영했다. 피해자와의 합의는 유리한 사정이지만, 최종훈은 공소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아 양형 기준에서 말하는 '진지한 반성'의 요건이 부족하다"면서도 2년 6개월을 감형했다.

일부 반영했다는 게 형량의 절반을 감형했는데 '진지한 반성'마저 적용했다면 형량은 더 줄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피해자와 합의하지 못한 정준영에 대해 재판부는 '진지한 반성'을 이유로 1심 징역 6년에서 1년 감형한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정준영에 대해 "항소심에서 합의를 위해 노력했지만, 현재까지 합의서가 제출되지 않았다"며 "다만 피고인이 공소사실 자체는 부인하면서도 구체적으로 그 당시 상황에 대해 진술한 점, 사실적인 측면에서 본인 행위는 진지하게 반성하고 있다는 취지의 자료를 낸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의 사법부는 통상적으로 성범죄 판결을 함에 있어 피해자가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감형해줬다.

피해자가 합의를 해주면 집행유예에 그칠 확률이 높기에 가해자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합의를 하려고 하고 이 과정에서 2차 피해가 발생했다.

피해자들이 "가해자 보호자나 변호사가 합의를 해달라고 연락하고 집과 회사로 찾아오기 때문에 소문이 날까봐 합의해줄 수밖에 없었다"며 치를 떠는 게 한국 현실이다.

물론, 최종훈이 피해자와 합의를 하는 과정에서 2차 피해가 발생했다고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정준영의 경우 합의를 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에 비춰 볼 때 이들이 피해자와의 합의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은 가능하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진지한 반성'이 감형의 기준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성범죄를 저질러도 '진지한 반성'을 한다면 형을 줄여준다는 현실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답답하다.

n번방 개설자 '갓갓' 문형욱(25)은 전날(12일)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은 뒤 취재진에게 "피해자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문형욱이 이 같은 기조를 유지하면 진지한 반성이 된다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박사 조주빈(25), 부따 강훈(19), 이기야 이원호(19)도 '피해자와 합의'하고 '진지한 반성'을 하면 재판부가 감형해줄 수 있다는 게 정준영과 최종훈의 항소심 판결을 통해 여지없이 드러난 것이다.

'진지한 반성'과 '피해자와의 합의'가 감형기준이 된다는 것은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양형기준을 강화하더라도 이처럼 판사의 판단에 따라 판결 내용이 항상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상희 법무법인 연송 변호사는 "사법부가 성범죄에 대해 제대로 된 처벌을 할 수 있을 만큼 피해자의 마음을 헤아린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며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양형기준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판사들이 해당 기준에 맞춰 제대로 판결을 내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게 다시 한번 드러난 셈"이라고 말했다.

▲ 주영민 사회부 기자


UPI뉴스 / 주영민 기자 cym@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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