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되돌아갈 수 없는 사랑의 기억과 그리움의 노래"

조용호 / 기사승인 : 2020-05-14 16: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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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순 신작 장편 '빌바오, 3월의 눈'
"헤어진 남친이 불쑥 위증을 요청"
연쇄고리의 권력이 왜곡시킨 어떤 '미투'
'질투'와 현대음악 매개로 본 진실의 이면

이즈음 한국 작단은 여성, 그중에서도 20~30대 작가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들이 다루는 소재도 주로 젠더의식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근년 들어 지속적으로 부는 페미니즘 바람에 영향을 받은 바 크다. 이 과정에서 부각된 이른바 '미투' 열풍도 이런 흐름에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작품은 오랜 가부장제에 억눌린 여성들의 평등 지향, 관행처럼 굳어져온 남성 중심 성에 대한 왜곡된 사고와 행동들에 대한 다양한 고발 관점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선명한 문제의식과 대결 구도가 지닌 장점은 그동안 왜곡된 것들을 바로잡는데 효율적인 방식일 테지만, 이분법으로 접근하다 보면 이면에 숨은 인간 본성의 복잡한 면들을 간과할 우려도 배제할 수 없다. 문학의 본질이 인간 심층의 다양한 이면을 들여다보는 속성을 지닌 것이라면 이 또한 고려해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 본성 중 하나인 질투와 권력이라는 틀 속에서 '미투'를 새롭게 들여다본 김경순 신작 장편 '빌바오, 3월의 눈'(문학수첩)이 눈길을 끄는 이유다.

▲'질투'라는 인간의 본질적 감정을 도구로 이른바 '미투'의 한 단면을 새롭게 파고든 소설가 김경순. 그녀는 "이 소설은 '미투' 사태가 터지기 전 초고를 완성해놓은 것으로, 사실 미투보다는 권력 관계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밝혔다. [김경순 제공]


헤어진 남친이 어느날 불쑥 "증인 좀 서줄래요"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온다. 우상으로 여겨지는 외국의 현대음악 작곡가에게 석박사를 사사하고 일찌감치 탄탄하게 교수로 정착한 이민석. 부모는 외무부 고위직이고 백부는 청와대에 재직하는 든든한 백그라운드까지 갖췄다. 그가 대학원생 제자 '연두'와 미투 사건에 얽히자 일년 전 헤어진 같은 대학 강사 송주연에게 거짓 증언을 요청한 것이다. 새로운 남친과 잘 지내고 있는 주연이 의당 그 요구를 거부할 것 같지만, 그리 쉽게 풀리진 않는다. 주연은 아직 민석에게 미련이 많다.

 

3월에 눈이 내리는 날, 민석의 뒷모습을 보고 마음이 움직였던 주연. 그들이 연인이었다가 헤어진 국면이 자신의 오해로 빚어진 일방적인 이별 통보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주연은 민석에 대해 완전히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다. 이런 상태에서 스물세 살의 작곡가 지망생 '연두'에 대한 질투에 휩쓸려, 민석의 편에 서서 위증을 하려고 한다.

 

"질투가 무서운 건 흔적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의 상처를 말하기엔 너무 사소한 것이다. 욕망이라든지 사랑이라고 하는 것들은 추상성을 구체화하는 '몸'이라는 도구가 있다. 하지만 질투는 무엇으로 그 존재를 입증할 것인가."

 

질투로 고통스러워하는 주연에게 '3월의 눈'은 민석에게 사랑을 느꼈던 따스한 모티프이다. 추운 노르웨이에서 살다가 따스한 스페인 빌바오로 요양차 온 작곡가가 만들었다는 가곡 '빌바오, 3월의 눈'도 같은 분위기다. 3월에 눈을 보는 것이 불가능한 곳에서 추운 곳의 추억을 되살리는 작곡가에게 "'3월의 눈'은 불가능성을 의미한 것"이었고, "그 불가능성은 삶일 수도, 사랑일 수도, 예술일 수도 있었다"고 작가는 규정한다. 

 

카잘스가 200년이나 묻혀 있던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악보를 헌책방에서 발견해서 초연했다는 '신화'는 사실 그보다 먼저 프랑스에서 악보가 발행됐고 음악홀에서 연주까지 됐다는 팩트를 묻어버렸다. 차이콥스키가 메크 부인과 헤어진 뒤 쓴 곡이 '비창'이거니와, 이 명곡이 탄생한 배경에는 사실 정신적 상실의 충격보다는 경제적 상실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작중인물은 말한다. "모두에게 좋다면 진실이 꼭 진실이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악의적으로 왜곡한 게 아니라면 도덕적으로 걸릴 게 없는 거 아닌가요?" 예술이 권력을 확보하는 이면사에 대한 주연의 강의 시간에 연두가 던진 이런 질문은 말미의 착종된 진실을 예고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주연은 '3월의 눈' 시절을 복원하고 싶은 갈증에 끝내 민석의 요구를 실행에 옮긴다. '민석은 젊고, 예쁘고 음악적 재능까지 뛰어난 연두를 상대로 추잡한 딜을 했다. 구석으로 몰고 가 앞발로 실컷 장난을 친 뒤 덥석 물어뜯었다. 주연은 그런 고양이 뒤에서 미끼를 던지고 발을 굴러 쥐몰이를 도왔다.' 주연은 그 위증으로 민석의 마음을 다시 얻을 수 있었을까. 주연의 증언 따위는 가치가 사라진 상태에서 연두는 민석의 배려로 콩쿨에서 훌륭한 성적을 얻고 연주회장에서 꽃다발 세례를 받는 상황. 여기에다 그날 연두의 곡이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하다면, 질투는 비등점을 향할 수밖에 없을 터이다. 질투는 다시 파괴를 향해 치닫고, 진실은 만들어진다.

 

"빌바오엔 따스한 햇살이/ 지금 내 고향 노르웨이에는 눈이 오고 있네./ 자작나무 숲에 눈꽃이 피어나고/ 내 찬 손을 감싸주던/ 당신의 얼굴에도 눈꽃이 피어나네."('빌바오, 3월의 눈')

  

이 가곡들 두고 주연은 "햇살이 따스한 곳에서 있으면서도 추운 고향을 그리워하는 작곡가의 마음"을 생각하며 "3월의 눈 오던 날 민석의 쓸쓸했던 뒷모습과, 그의 차에서 '달에 홀린 피에로'를 듣던 날과, 그의 집에서 책장 가득 채워져 있던 희귀 음반들을 황홀하게 쓰다듬던 기억"을 떠올린다.

▲김경순은 "모든 사랑은 공감"이라며 "공감이 아닌 사랑은 자기애에 불과하다"고 소설에서 말한다. [김경순 제공]


이 '되돌아갈 수 없는 사랑의 기억과 그리움의 노래'처럼 불가능에 집착한 주연은 결국 자신을 파괴하고 마는가. 어린시절 언니가 자살했던 이유도 그녀가 다다른 '질투의 협로' 때문이었을까. 주연은 자신이 연두와 민석에게 한 행동은 질투가 아니라 시기심이었다고 깨닫는다. 작가는 정신분석학자 멜라니 클라인의 성찰을 빌려 말한다. '질투가 삼자관계에서 대상에 대한 사랑을 근거로 한다면 시기심은 오로지 파멸만을 목적으로 한다. 질투가 고상하기도 하고 비열하기도 하다면 시기심은 오직 비열하기만 하다.'


'문학수첩' 신인상으로 문단에 나와 김만중문학상을 수상한 김경순은 "이 소설은 '미투' 사태가 터지기 전 초고를 완성해놓은 것으로, 사실 미투보다는 권력 관계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며 "다시 쓴다고 해도 본격적인 미투 소설로 다루고 싶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미투'를 하나의 형태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질투라는 인간의 본질적 감정을 도구로 바라보았다"면서 "크든 작든 누구나 쥐게 마련인 권력의 구조가 사람들에게 똑같이 작동하는 게 아니고, 개인마다 발현되고 수용하는 양상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이 소설은 현대음악을 작곡하는 인물들이 중심에 있다. 현대음악이란 소음보다 더 거슬리는 불협화음을 통해 예술의 본질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속성을 기본으로 한다. 단순한 선악의 이분법이 아니라 그 이면을 다시 한 번 들춰 보임으로써 불편한 현실을 복합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작가의 의도와 맞아떨어지는 메타포인 셈이다. 현대음악이라는 낯선 세계에 대한 지식은 이 소설의 덤이다. 마지막에 이르러 어린시절 질투의 협로에 갇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언니의 영가 앞에 선 주연. 그녀는 '3월의 눈'을 기다리며 좁은 마음의 길을 헤맸던 언니를 위해, 이제 같은 처지의 자신을 향해, 노래를 바친다.

 

"어디에 있나요. 3월의 눈 내리는 빌바오의 좁은 길 어디를 헤매고 있나요."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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