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바람과 불이 낱장을 넘기는 거대한 책"

조용호 / 기사승인 : 2020-05-29 11: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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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천재작가' 실비 제르맹 첫 장편 '밤의 책'
피와 재의 밤들을 지나온 이들을 위한 레퀴엠
매직리얼리즘으로 빚어낸 유럽판 '백년 고독'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의 작가

"그의 조상들이 살아온 저 원양(遠洋)의 밤, 그 밤 속에서 그의 족속들은 대대손손 잠자리에서 일어났고, 길을 잃었고, 살았고, 사랑했고, 싸웠고, 상처를 입었고, 잠자리에 들었다. 외쳤다. 그리고 침묵했다. …세상의 출현을 주재한 시간 밖의 밤, 그리고 바람과 불이 그 낱장을 넘겨본 어떤 거대한 육신의 책인 양 세상의 역사를 연, 전대미문의 침묵의 외침."

 

'바람과 불이 낱장을 넘기는 거대한 육신' 을 표방한 소설이 있다. 이 육신은 태곳적부터 존재해온 인류를 통칭하는 집합 개념이다. 독자들이 인간이라는, 인류라는 거대한 육신을 바람과 불의 힘을 빌려 넘기게 되는 책, 전설과 신화와 민담과 우화를 섞어 환상적 서사로 전개하는 책. 프랑스 작가 실비 제르맹(66)의 '밤의 책'(김화영 옮김·문학동네)은 이런 책을 지향하는 소설이다.

 

시적인 문체로 현대 프랑스 문단에서 독특한 개성을 확보하고 있는 실비 제르맹이 1985년 발표한 이 첫 장편소설은 여섯 개 문학상을 받으면서 그녀의 이름을 화려하게 알렸다. 이후 후속편 '호박색 밤'을 비롯해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숨겨진 삶' '마그누스' '분노의 날들' 등을 펴냈지만, 정작 그의 첫 장편은 불문학자 김화영이 10년 동안 붙들고 씨름하다가 최근에야 번역을 끝내고 국내 독자들에게 선보였다.

▲독특한 서사와 미려한 문체로 현대 프랑스 문단에서 뚜렷한 위상을 확보하고 있는 실비 제르맹. '밤의 책'은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로 국내에 먼저 알려진 이 작가의 뿌리를 엿볼 수 있는 첫 장편이다. [문학동네 제공  ©Tadeusz Kluba]


인류가 태동한 먼 바닷속에서 민물로 거슬러 올라와 살던 페니엘. 운하를 오르내리며 석탄을 운반하는 일을 하면서 아내 비탈리에게서 7명의 자식들을 낳았지만 7번째 아이만 살아남았다. 페니엘은 바지선 키를 잡은 채 신화처럼 죽고, 살아남은 아이 테오도르포스탱이 대를 이어 물 위를 오르내린다. 테오도르포스탱은 쌍둥이 오누이를 낳고 아내가 세 번째 아이를 임신할 무렵 살육전(1870년 보불전쟁)에 끌려갔다가 창기병이 휘두른 창끝에 두개골과 얼굴이 두 쪽으로 갈라진 듯한 상처를 입고 겨우 돌아온다. 파괴된 영혼과 뒤틀린 욕망 속에서 딸을 근친상간하고, 그 결과 '빅토르플랑드랭'이라는 문제적 인물이 탄생한다.

 

"그녀가 피를 흘리면 흘릴수록 그 피는 검은색, 번쩍번쩍 윤기가 나는 검은색으로 변했다. 마치 별의 부스러기들이 점점이 박힌 밤 그 자체의 피가 밀물처럼 쏟아져나오는 듯했다. …저 높은 곳에서 반짝이는 저 모든 작은 별들! 그러니까 저게 바로 죽음이 그녀를 따라다니느라 신고 버린 수천수만의 신발들이었나? 그녀는 아주 잠깐 미소를 지었다. 죽음은 그녀를 따라잡고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뒤를 따르도록 권유하고자 수많은 황금빛 신발들을, 진짜 무도회용 신발들을 신었던 것이다."

 

할머니 비탈리가 죽음에 따라잡히자, 빅토르플랑드랭은 대지의 동공 같은 검은 석탄을 캐다가 유언을 받들어 세상으로 나아간다. 그의 그림자를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할머니의 미소와 아버지가 뒤늦게 흘린 회한의 눈물방울 일곱 개를 유산으로 지니고 물을 떠나 땅으로 간다. 할머니는 끝까지 그를 지켜줄 것이라고 말하고, 그 말은 쉼없이 따라다니는 그림자로 실천된다. 빅토르플랑드랭 얼굴에는 석탄가루가 자욱히 박혀 있고, 왼쪽 눈에는 별모양 금빛 반점이 찍혀 있어서 그는 '황금의 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검은 땅 숲속에서는 늑대들을 장악해 사람들로부터 '황금의 밤 늑대 낯짝'이라는 별명을 추가로 얻는다. 이후 그가 다섯 명의 여자들로부터 낳은 열다섯 명의 자식들은 모두 왼쪽 눈에 크건 작건 황금반점을 표지처럼 지니고 태어난다.

  

이 소설은 '물의 밤'에 이어 '땅의 밤' '장미의 밤' '피의 밤' '재의 밤' '밤 밤 그 밤'으로 전개되거니와, 1870년 보불전쟁부터 1945년 2차세계대전 종전 시점까지 인간의 삶과 욕망과 대학살의 참혹한 재난을 장엄하면서도 시적인 서술로 보여준다. '검은 땅'에서 어렵사리 행복을 찾았던 빅토르플랑드랭은 아내가 말의 뒷발에 채여 죽자 그 말의 목을 단칼에 잘라서 머리를 마당 입구 문설주에 걸어놓았다.

 

"그것이 겨냥하는 것은 오로지 '그', 죽음이 언제나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나타나서 인간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고생스럽게 이룩해놓은 행복을 감히 단 한 번의 뒷발질로 망가뜨려놓는 꼴을 발밑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그'뿐이었다."

이 황당한 재난은 시작일 뿐이었다. 참혹한 전쟁터에서 돌아온 그의 아버지가 아들만은 그 횡액을 피하라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를 일찍이 잘라버렸지만, 정작 그의 쌍둥이 두 아들은 1차 세계대전에 징집돼 한 아들만 살아 돌아온다. 그 아들은 자신이 절대 한 몸이 아니라고 부르짖으며 죽은 아들의 연인에게 새로운 생명을 심어놓는다. 이 아이는 등에 저주처럼 혹이 달린 채 태어났다. 빅토르플랑드랭이 이 손자와 함께 파리로 가서 만난 여인을 데리고 돌아와 다시 낳은 아이들은 물론, 보육원에서 데려온 여자에게서 낳은 쌍둥이 자매를 비롯한 그의 모든 자손들은 2차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죽거나 불에 탄다. 검은 땅 높은 지대까지 밀려든 살육은 불 속에서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버린다. 그렇게 '피와 장미와 재의 밤'이 지나가고, 이어지는 '밤 밤 그 밤'에서는 잿더미 속에서 새 생명이 다시 태어나면서 후속작 '호박색 밤'을 예고한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이 콜롬비아의 100년에 걸친 내전을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보여주면서 세계문학에 큰 푯대를 세웠다면, 이 소설은 마르케스의 걸작을 오마주하는 '유럽판 백년 고독'처럼 다가온다. 근친상간의 저주로 돼지꼬리가 달린 아이가 태어나는 남미의 고독처럼 '유럽의 고독'에서도 그 행위로 인해 눈동자에 황금빛 반점이 대대로 이어지는 셈이다. 빅토르플랑드랭의 눈에 박힌 황금빛 반점이 하나 사라질 때마다 그의 자식들도 하나씩 죽어간다. 부모님 유골 자루를 메고 나타난 '백년 고독'의 어린 소녀는 흙과 석회가루를 먹어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쌍둥이 아들 한쪽의 씨앗을 임신한 '밤의 책'의 여자는 젖은 흙을 정신없이 퍼먹는다. 페니엘이 남긴 자손과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의 자식들이 동일하게 17명인 점도 실비 제르맹이 마르케스를 오마주한 상징적인 대목이다. 부엔디아 대령의 자식들은 이마에 재의 십자가가 새겨져 있었고, 그들 모두는 '밤의 책' 자손들처럼 학살당했다.

 

"그는 반항조차 하지 않았고 더 이상 신에 대한 분노도 증오도 느끼지 않았다. 무슨 소용인가. 결국 신은 존재하지도 않고, 하늘은 땅과 마찬가지로 황량하며 그의 집과 마찬가지로 텅 비어 있으니 말이다.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리고 이제는 그의 눈앞에서 조용히 불타고 있는 그 모든 사람들 이외에 다른 신은 없었다. 그는 서서히 잿더미로 변해가는 신의 변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를 먼저 번역해 실비 제르맹을 2006년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했던 김화영은 우여곡절 끝에 이 작품 번역을 끝낸 뒤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이 천재적인 소설가를 소개해주었던 로제 그르니에의 하얀 무덤 돌 위에 이 책을 헌정하고 싶었다"고 후기에 밝혔다. 그는 "실비 제르맹은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과 신기한 초자연적 현상이 미신, 전설, 신화의 세계를 넘나들며 그녀만의 고유한 마법적 리얼리즘을 구사하는 가운데 방대한 서사시적 벽화를 그린다"고 덧붙였다. 실비 제르맹의 장엄한 문체와 김화영이 공들여 찾아낸 대응 언어가 빚어내는 화려한 연주는 한글판 '밤의 책'에 여러 밤 내내 이어진다.


아버지의 전쟁, 아들의 전쟁, 손자의 전쟁은 모두를 앗아가고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지만, 그 속에서도 다시 인간이라는 종은 새로 태어난다. 산불이 지나간 자리에 어김없이 때가 되면 다시 솟는 풀처럼, 사람도 검질긴 생명력으로 끊임없이 다시 자라난다. '새로운 아기의 울음소리에서 끝없이 다시 시작되는 이 세계의 쓰라리면서도 동시에 생명력 강한 아름다움을 전에 없이 감지할 수 있었다.' 인류의 재난과 비극을 활자로 연주하는 레퀴엠으로 위로받고 싶다면, 잠이 오지 않는 밤 머리맡에 두고 펼쳐들어도 좋다.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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