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삶"

조용호 / 기사승인 : 2020-07-24 08:4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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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 단편 모은 소설집 '여름의 빌라'
무한반복되는 욕망과 사랑을 향한 분투
애잔하게 흐르는 파스텔톤 회한과 자각
"안온한 혐오의 세계에 안주하지 않기를"

잠옷 차림의 여자가 남자를 격렬하게 포옹하는데 누군가 나타나 그녀의 팔을 억지로 풀고 번쩍 들어서 옆으로 누인 채 남자의 품에 안긴다. 여자는 순식간에 축 늘어진 시체처럼 보이지만, 바닥으로 흘러 떨어진 그녀는 이내 다시 남자를 격렬하게 껴안는다. 격한 느낌의 사랑이 순식간에 죽음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사랑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방 같은 이 동작은 지루하도록 반복된다. 생명과 죽음, 혹은 욕망과 좌절이 하염없다. 독일 현대무용가 피나 바우쉬(1940~2009)의 영상작품 '카페 뮐러'의 장면이다. 소설가 백수린은 이 작품에 기대어 활자로 새로운 작품을 변주한다.

 

▲2011년 신춘문예로 등단해 애잔한 문체와 따스한 감성으로 독자들을 확보한 소설가 백수린. 시몬 드 보부아르로 프랑스 리옹2대학교와 서강대에서 동시에 박사 학위도 받았다. [문학동네 제공] 


단편 '아직 집에는 가지 않을래요'에 등장하는 여자는 동네 한쪽 고급 주택가에 자리잡은 붉은 지붕의 집을 동경한다. 언젠가 그 집에 들어가 살 것을 바라는 그녀는 두 아이를 키우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들어앉았다. 오랜만의 외출에서 근육이 아름다운 남자 무용수를 만나지만, 그녀는 한때 무용을 좋아했던 자신의 초라한 몸을 돌아본다. 그 남자의 무용 공연조차 남편의 야근으로 인해 놓치는데, 그녀가 바라던 붉은 집까지 철거되고 있다. 맹수처럼 벽을 부수는 남자의 단단한 등 근육을 맹렬히 쳐다보던 여자는 더럽고 위험한 철거 현장에서 낯선 남자에게 성적 충동을 느낀다. 그녀는 깨닫는다. '일찍 철이 든 척했지만 그녀의 삶은 그저 거대한 체념에 불과했음을.'

 

체념을 했다지만 무의식의 뿌리에 자리잡은 욕망까지 거세되진 못했을 것이니, 욕망을 향한 자맥질은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무한 반복될지 모른다. 피나 바우쉬의 '카페 뮐러'는 소설 속에서 그녀가 행복했던 시절 본 영화 속 작품으로 한 번 거론될 따름이지만, 소설 전반에 흐르는 바탕색의 정조와 겹친다. 이 단편은 최근 출간된 세 번째 소설집 '여름의 빌라'(문학동네)에 수록된 여덟 편 중 하나로, 백수린이 "독자들이 내 작품과 겹쳐 읽길 바라는 영화나 미술, 음악, 혹은 다른 문학작품들에 대한 힌트를 곳곳에 남겨두었다"고 밝힌 맥락의 전형이다.

 

욕망이 좌절당하는 여성의 처지를 환기시키면서 그 한계를 돌파하려는 또다른 몸짓은 '시간의 궤적'에서도 보인다. 파리 어학원에서 만난 '언니'는 삼십대 중반에 찾아온 주재원 자리를 포기하지 못해서 애인에게 "넌 왜 그렇게 독하고 이기적이니?"라는 말을 들은 뒤 그와 헤어져야 했다. 언니는 프랑스에서 외로운 밤마다 이미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어버린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짧은 통화를 하고 나서는 혼자 운다. 이후 프랑스 남자를 만나 결혼한 뒤 우울한 '나'는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처럼' 여전히 싱글인 언니에게 "그건 나쁜 거 아닐까. 언니는 남의 가정을 망가뜨리고 싶어?"라고 말했다. 그때 언니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억지로 웃으려고 하지만 끝내 물에 녹아내리는 물감처럼 한없이 희미해지던.' 언니는 우산을 써봤자 아무 소용없는 비 속에서 우산을 접고 비를 쫄딱 맞은 채 나에게도 빗속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었다. 그날을 추억하면 '나'는 어김없이 울고 싶어진다.

 

당당하게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던 여성도 등장한다. '폭설'에 등장하는 엄마는 딸이 열한 살이었을 때 떠났다. 다른 남자를 좋아해서 아빠에게 이혼을 요구했고, 미국으로 떠나 금방 재혼했다. 후일 미국으로 찾아간 딸이 엄마와 나눈 대화. "엄마한테는 세상에서 연애가 가장 중요해?" "가장 중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취업보다야 연애가 훨씬 중요하지. 사랑받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건데." 모녀는 미국의 한적한 길에서 폭설에 갇혔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오는데 두껍게 내려앉은 침묵을 깨고 엄마는 말한다. "짐승을 한 마리도 치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 우린 참 운이 좋구나."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폭설이 내리는 생의 길목을 지나오는 건 운이 좋아야 겨우 가능한, 기적 같은 일이다.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도 그 욕망은 쉬 사라지지 않는다. '흑설탕 캔디'의 할머니는 엄마 없이 자라는 손자 손녀를 돌보기 위해 프랑스로 발령받은 아들을 따라 파리로 온다. 학창시절 윤심덕과 김우진, 슈만과 클라라를 생각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던 그녀는 '앞으로 펼쳐질 인생에 놀라운 사건들이 가득할 거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았으며 '자신에겐 인생을 하나의 특별한 서사로 만들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이제 할머니가 되어 이국에서 말년을 보내는 그녀 안에는 '고독이 눈처럼 소리 없이 쌓였다.' 아래층에 사는 피아노 치는 노인 브뤼니에 씨와 가까워진 배경이다.

 

이들 노인의 교류가 '생의 가장자리로 떠밀려온 사람들 사이의 연약한 연대나 우정'이었는지 사위지 않은 마지막 연애의 뜨거움이었는지는 모르되, 그 할머니 '박난실'이 '나'의 꿈속에 나타나 주먹을 꼭 쥔 채 놓지 않는 것이 있다.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으로 보아 손에 쥔 것은 할머니와 브루뉘에 씨가 탑을 쌓는 놀이를 하던 각설탕 같다. 백수린은 이 단편이 "이번에 묶은 여덟 편의 소설 중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며 "시몬 드 보부아르가 열여덟 살 때 쓰다 만 습작 장편의 서두 부분에서 영감을 얻어 쓴 소설"이라고 특별히 밝혔다.

 

여성의 주체적인 전진과 그 진행을 가로막는 환경에 대한 환기 혹은 인간 보편의 욕망과 그 좌절의 내막을 위 세 작품이 변주하고 있다면, 나머지 작품들은 백수린 스타일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긴 세월의 폭력도 삶에 대한 지향을 이길 수 없다'는 전언은 첫머리에 배치한 표제작 '여름의 빌라'에서 읽을 수 있다. 베를린에서 무차별 테러에 딸을 잃은 독일인 부부가 앙코르와트 사원에서 폐허를 뚫고 뻗어나간 나무 뿌리를 보며 삶의 지속성을 떠올리는 대목은 눈물겹다. '아주 잠깐 동안에'에 등장하는 선량한 젊은 커플은 서로 안고 있어도 왠지 고독하다. 아내는 강요하는 듯해서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거절했고, 남편은 무거운 버려진 세탁기를 리어카에 싣고 비탈길을 올라가는 노인을 도와주다가 순간 귀찮아했던 일을 떠올린다. 타인에 대한 연민의 경계에 머무는, 이기적인 인간에 대한 쓸쓸한 자각이 고독하다.

 

'고요한 사건'은 재개발이 예정된 동네에서 살았던 이야기다. '나'는 그 동네 친구들 '해지'나 '무호' 같은 아이들과 어울리기는 하지만 그들 속에 끼지는 못하고 경계에 머무는 존재였다. 길가에 죽은 채 버려진 고양이 사체를 묻어주려다 바람 부는 추운 바깥에 나서기 망설여져 포기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나'는 '그것이 내 인생의 결정적인 한 장면'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나는 평생 이렇게, 나가지 못하고 그저 문고리를 붙잡은 채 창밖을 기웃거리는 보잘것없는 삶을 살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으니까.'

 

▲백수린은 "나에게는 성급한 판단을 유보한 채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직시하고 찬찬히 기록하는 것이 사랑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문학동네 제공]



문고리를 잡은 채 쉼없이 바깥을 기웃거리는 삶이란, 소설가의  삶과 다르지 않다. 소설은 창밖의 현실을 직접 수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문밖의 풍경을 관찰하며 다양한 무늬로 그려낼 수는 있다. 백수린이 이야기하는 '사랑'이란 사람끼리의 감정에 국한되지 않는, 지금 이곳을 조금이라도 더 따스한 곳으로 만들려는 모든 노력을 포함하는 어휘이다. 그녀는 "전 세계적으로 목도하고 있듯이 이해는 오해로, 사랑은 혐오로 너무 쉽게 상해버리고, 그런 생각을 하면 어둡고 차가운 방에 홀로 남겨진 듯 슬프고 또 무서워진다"면서 "이 세상을 살기 위해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이해와 사랑 말고는 달리 아무것도 없다고 나는 여전히 믿고 있다"고 썼다.

"지금 이 순간, 이 책을 읽고 있는 당신. 나는 당신이 안온한 혐오의 세계에 안주하고픈 유혹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사랑 쪽으로 나아가고자 분투하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나는 이 여름, 그런 당신의 분투에 나의 소설들이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줄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고 있다."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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