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가 왜 대한민국 공문서에서 나와?

김들풀 / 기사승인 : 2020-09-17 14:2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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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르게] ③ 한자 혼용 공공언어
한자 많이 쓴 기관 '국방부', '산업통상자원부', '해양수산부' 순
'국어기본법' 헌법소원 제기한 공무원도 등장
한글은 우수하다. 일찍이 벽안의 이방인이 알아봤다. 미국인 호머 헐버트가 뉴욕 트리뷴을 통해 한글의 우수성을 알린 게 1889년이다. 헐버트는 "한글은 완벽한 문자"라고 극찬했다. "최소 문자로 최대 표현력을 갖는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한글의 주인'은 그 가치를 망각하고 사는 듯하다. 바른 한글 사용을 선도해야 할 정부부터 그러하다. 정부부처의 공공문서엔 오염된 언어 투성이다. '공문서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우리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국어기본법을 정부가 앞장서 위반하는 꼴이다. 이런 행태가 국민과의 소통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음은 물론이다.

UPI뉴스는 43개 정부 부처의 공공언어 실태를 취재, 분석해 기획보도 [우리말 바르게]를 연재한다.

▲ 1968년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국어 교과서 [출처: 교과서 한자 혼용과 초등 한자 교육 반대 범국민대책위원회]

정부 공문서엔 여전히 한자가 수두룩하다. 이를테면 "全軍的 노력 결집으로 전작권 전환 기틀 마련" "訪美사상 최초 남북미 정상회동" "데이터 확충 및 異種 데이터 연계 시스템 구축" 등이다. 1960~70년대를 연상케 하는 문서가 아닐 수 없다. 

UPI뉴스와 한국어인공지능학회가 함께 정부 부처·청·위원회 등 정부 부처 43곳 주요 문서를 수집해 조사, 분석한 '2020년 공공문서 사용실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43개 정부 부처 중 한자를 가장 많이 사용한 기관은 국방부다. 공문서에 1000 낱말 당 한자어를 무려 22개나 사용했다. 그다음으로는 산업통상자원부와 해양수산부가 1000 낱말 당 10개를 사용했다.

다행히도 부처 절반 가까이는 거의 쓰지 않거나 아예 사용하지 않았다. 한자를 아예 쓰지 않은 기관은 '문화체육관광부', '국민권익위원회', '여성가족부' 등 11개 기관이다.

한자 사용 대부분은 "前, 現, 全, 新"(전, 현, 신)과 같이 한 음절 어휘였고, "對中, 對北, 訪美"(대중, 대북, 방미)나 '全軍的'(전군적)과 같은 어휘도 많았다.
▲ 43개 정부 부처 공문서에 로마자를 그대로 쓴 기관 순위. [출처: 공공언어 실태조사 보고서]

공공기관의 한자 사랑은 남다른 듯하다. 2012년 10월 한자 세대인 한 공무원은 국어기본법 때문에 공문서를 작성할 때 한문을 쓸 수 없어 불편하다는 이유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공문서를 작성할 수 없어 직무수행과정에서 의사 표현과 관련한 개인적 불이익이 발생했고, 이로 인해 행복추구권이 침해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2016년 11월 공문서에 한글로 작성하도록 한 국어기본법 조항은 '헌법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결정문에서 "공문서는 대부분의 국민이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한글로 작성될 필요가 있다"며, "굳이 한자를 쓰지 않더라도 문맥으로 그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뜻을 정확히 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 괄호 안에 한자를 쓸 수 있어 국어기본법 규정이 특별히 한자어의 의미 전달력이나 가독성을 낮추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한자나 외국어는 괄호 안에 써야 한다'는 현행 국어기본법 14조 공문서 작성 규정은 엄밀히 따져 완벽한 한글 전용이라기보다는 한자 병기를 일정 부분 허용한 것이다.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의 경우 국민 문맹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이후 정보화 시대로 접어들자 '한자 망국론'까지 대두됐다. 그러자 중국 정부는 복잡한 한자 획수를 절반으로 줄이고 영어를 빌려 발음을 표기하는 병음으로 겨우 위기를 넘겼다.

더 나아가 중국 정부는 2012년 자국민 언어·문자·응용 능력을 높이기 위해 '국가 중장기 언어문자 사업 8개년 계획'을 내놨다. 이는 한자가 국제화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방증이다.

이미 종주국 중국조차 어렵고 복잡한 한자를 수정 보완하며 사용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대한민국 공공기관들은 왜 과거 관행을 답습하는 것인가. 국민과의 소통을 위해 어떤 '공문서 쓰기'가 효과적인지 자문해볼 때다.  

UPI뉴스 / 김들풀 IT과학 전문기자 itnews@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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