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안도현 "알아도 꽃이고 몰라도 꽃이다"

조용호 / 기사승인 : 2020-09-24 11: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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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전라도에서 경상도 고향으로 돌아가며 펴낸 신작 시집
절필 기간 거쳐 8년 만에 내는 '첫 시집' 같은 떨림
"세상 풍문에 귀를 닫고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기를"

매년 이맘때면 피어나는 국화과 꽃 중에 쑥부쟁이와 구절초는 생김새가 비슷하다. 안도현(59) 시인은 젊은 시절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絶交)다"('무식한 놈')고 자탄했다. 그가 달라졌다. 그는 이제 "이름에 매달릴 거 없다/ 알아도 꽃이고 몰라도 꽃이다"('식물도감')고 물러선다. 절필 기간을 거쳐 8년 만에 들고 돌아온 열한번 째 시집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창비)에서 보인 태도다.

 

자신과 스스로 절교까지 선언할 정도로 깐깐했던 시인에게 그동안 어떤 자각이 찾아든 걸까. 새 시집 출간을 알리는 온라인 간담회를 마치고 귀가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올 초 40여년 살던 전라북도를 떠나 경북 예천 내성천변에 집을 지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절필 기간을 거쳐 8년 만에 새 시집을 펴낸 안도현 시인. 그는 "첫 시집을 내는 것처럼 떨린다"고 말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볼 줄 아는 눈만 있으면 명명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있는데도 못 보는 게 문제지. 삼십대 중반까지만 해도 잘 안보였습니다. 우리 삶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작은 게 늘 가까이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있다가 어느 날 보이기 시작한 거지요. 보이기 시작하니 이름을 알게 되고, 그러면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그것마저 없어져야 제대로 보입니다."

 

사실 낮은 곳과 작은 것에 눈을 맞추는 태도는 시인에게 주어진 기본 책무일 테지만, 1980년대 벽두에 문단에 나와 전교조 해직 교사 시절도 겪었던 그에게 시는 더 큰 것이었다. 그는 "시가 세상을 바꾸는 역할도 해야 되고 그렇게 믿었던 적도 있었다"면서 "시간을 살아보니 시가 해야 될 일은 그런 커다란 일보다 작은 거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날 간담회에서 말했다.

 

"그릇에는 자잘한 빗금들이 서로 내통하듯 뻗어 있었다/ 빗금 사이에는 때가 끼어 있었다/ 빗금의 때가 그릇의 내부를 껴안고 있었다// 버릴 수 없는 내 허물이/ 나라는 그릇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했다"('그릇')

 

그는 "그동안 금이 가 있었"던 자신에게 반성문을 쓴다. 그 성찰은 고향으로 돌아가 새로 지은 집 마당에 꽃밭을 일구면서도 이어진다.

 

"꽃밭에 심을 것들을 궁리하는 일보다 꽃밭의 경계를 먼저 생각하고 돌의 크기와 모양새부터 가늠하는 내 심사가 한심했어라/ 하지만 좋았어라 돌을 주워들 때의 행색이야 손바닥 붉은 장갑이지만 이 또한 꽃을 옮기는 일과도 같아서 나는 한동안 아득하기도 하였어라/ 그렇다면 한낱 돌덩이가 꽃이라면 돌덩이로 가득한 이 세상은 꽃밭인 것인데 거기에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아무 욕심이 없어졌어라/ 나와 나 아닌 것들의 경계를 짓고 여기와 여기 아닌 것들의 경계를 가르는 일을 돌로 누를 줄 모르고 살아왔어라"('꽃밭의 경계')

 

그 마당에 연못을 들이면서는 '세상의 풍문에 귀를 닫고 실로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게 찰랑거릴 수' 있기를 희망한다.

"텅 빈, 연못도 아닌 허공이 마른입을 내밀고 얼마나 젖을 빨고 싶어하는지, 머잖아 좌우의 골짜기가 소란스럽게, 어느 때는 유치원생처럼 칭얼거리며 물소리를 내려보내고 싶어하는지 나는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보았지요 당신이 내게 괴어 오듯이 물이 오면 나는 못물이 어디서 왔는지 그가 살던 골짜기의 주소라도 귀띔해 달라고 보채기도 할 겁니다만/ (…)/ 누구나 흉중에 언덕과 골짜기와 연못의 심상이 있을 겁니다만 그동안 고심이 깊어 나한테 그 어떤 선물 한번 하지 않고 살았어요 당신의 숨소리를 받아 내 호흡으로 삼을 수 있다면 세상의 풍문에 귀를 닫고 실로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게 찰랑거릴 수 있다면 나는 그걸 연못의 감정이라고 부를까 해요"('연못을 들이다')

 

이러한 심정의 변화 속에서 시의 형식에 대한 도모도 눈에 띈다. 그는 "시에서 시인이 지향하는 의식이나 내용을 먼저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갈수록 형식에 매료된다"면서 "특히 단시 형식이 주는 장점들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형식을 고려하는 차원에서 그는 우선 짧은 시들을 써보고 싶었다고 했다. 그것도 다섯 줄 이내의 짧은 시. 그 대상으로 식물들을 설정하고 200편 쯤 써보려고 했는데, 이번 시집 3부에 '식물도감'으로 묶어 선보인 그 시편들은 100편을 못 채웠다고 아쉬워했다.

이 짧은 시 묶음에서 표제로 사용한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도 나왔다. 한때 작가들 레지던시 공간으로도 기능했던 변산반도 목조 펜션 '변산바람꽃'에는 '안도현의 방'도 있거니와, 서해 풍경이 근사한 이곳의 이층 창가에 능소화가 올라와 피었을 때 저 시를 떠올렸다고 했다. 서해를 향해 나팔처럼 피어있는 주홍빛 능소화가 시인을 위해 악기로 봉사한 것이다. 역대 창비시선 중 이 시집 제목이 가장 길다. '식물도감'은 이렇게 이어진다.

 

"산괴불주머니꽃이 지지직거린다/ 마당에 전기가 들어온 거다"

"작년에 죽은 친구야/ 벚나무 아래 놀던 사진 속에서는 빠져나가지 말아라"

"시누대 잎사귀는 빗방울 튕겨내는 솜씨가 다들 달라서/ 어스름이면 그리하여 잎사귀 아래로 다스리는 어둠의 농도도 제각각 달라서"

"두릅 새순 위에 진눈깨비, 진눈깨비/ 맨발로 다니다가/ 가시에 찔릴라"

 

▲안도현은 "격렬한 시를 쓸 수도 있지만 시 쓰기를 포기하는 것으로도 저항할 수 있다고 여겼다"면서 "한때는 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열정을 가졌지만 지금은 낮고 작은 것들에 관심이 더 간다"고 말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이번 시집에는 어머니 임홍교 여사와 다섯 고모들 연보를 시로 내세운 형식도 눈에 띈다. 그는 "평전이나 전기를 보면 일생을 정리해놓은 연보가 평전 내용보다 더 재미있을 때가 있다"면서 "어머니 칠순 때 형제들끼리 어머니 살아온 일을 태어났을 때부터 최대한 뒷조사해서 어머니 살아온 시간을 기록해보자"고 했는데 "써놓고 보니 이 속에 시적인 게 들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시적 수사를 통해 자기를 표현하기보다, 그냥 평범하게 살아온 어머니 고모 같은 분들 삶 속에 수사보다 더한 시적인 게 들어있는 거 아닌가 생각한다"면서 "보통 시라고 하면 지어내고 꾸며 만들어내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세상을 오래 살아온 분들의 팩트 자체도 시가 아닐까 싶다"면서 "비시적인 걸 시적으로 만드는 일이기도 한데, 당분간 더 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1939년 일본 구로사키에서 조선인 노무자 임돌암과 최도홍 사이 4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1958년(20세) 호명면 황지리 소망실에 사는 다섯 살 위 청년 안오성과 혼인하였다 …혼인 후 사흘 만에 신랑은 군대에 갔다/ …/1961년(23세) 큰아들 도현이 태어났다/ …/1981년(43세) 남편이 서울대병원에서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시아주버니가 죽어도 고향에서 죽어야 한다며 예천으로 데려갔고, 음력 7월 5일 삼복더위에 숨을 거두었다. 아들 넷이 모두 대학생부터 국민학생까지 학생이었다. 남편이 심은 벼를 거두어 추석 제사를 지냈다/ …/2019년(81세) 8월 용궁면에서 열리는 큰아들의 행사를 보러 갔다가 쓰러져 뇌경색 판정을 받고 자리에 누웠다."('임홍교 여사 약전')

 

안도현은 2012년 문재인 캠프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면서 올린 트윗이 빌미가 되어 3년여 동안 대법원까지 가는 긴 재판을 거쳐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는 박근혜 정부 아래서는 더 이상 시를 쓰지 않겠다고 절필선언을 했다. 저항시를 쓰던 시절에는 결연히 비판하고 투쟁하는 시를 선보였겠지만, 그는 시를 쓰지 않음으로도 저항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괜히 혼자 오기 부리는 거 아닌지, 뭔가 달라진 걸 보여줘야 하는 부담이 많았다"면서 "다행히 그 시간 동안 저 스스로 돌아볼 시간 있어서 좋았다"고 말했다.

 

이제 유년의 공간으로 돌아간 그는 "유년은 과거 회귀의 회상 관점으로 보기 쉬운데 유년의 공간은 내 속에 있는 거고 내 고향이 어떻게 변해야 하고 어떤 점을 강조해야 하는지 이런 점에 관심을 가지고 싶다"면서 "유년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지금부터 새로 유년을 사는 것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고향에 돌아가 예천을 알리는 계간지 '예천산천'을 2호째 발간했고, 지역 학생들을 모아 시를 가르치는 문예반 선생도 시작했다.

▲안도현은 "갈수록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면서 "대체로 무지몽매한 자일수록 시로 무엇을 말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인다"고 후기에 적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대부분 경상도 지역에서는 탈향을 하면 수직으로 서울을 향해 올라가는데 그는 수평 이동해서 전라도로 갔고, 그곳에서 전라도 여자와 결혼한 뒤 아들 딸 낳아 40여년 살았다. 그는 전라도에서 자신의 세계관과 역사관을 쌓았다고 말한다. 그가 전라도에서 건져낸 시편은 신춘문예 당선작 '서울로 가는 전봉준'을 필두로 수를 헤아릴 수 없는데, 이번 시집에는 그 땅을 떠나면서 익산미륵사지석탑의 마음을 봉안했다.

 

"절을 세우고 앞마당에 탑을 올린들 연못의 수위가 높아지겠는지요// 흔적도 없이 당신이 왔다가 가신 걸 저는 말하지 못하였습니다 젊은 날의 햇볕은 과분하였지요// 당신이 사택왕후로 오른 이후 저는 구들장처럼 납작해지고 까매졌습니다 허공을 정으로 쪼아 구멍을 파고 꽃을 피우는 일로 밥을 벌었지요 하나 매번 꽃받침이 먼저 흐느끼는 통에 꽃잎은 파당파당 떨었습니다// 제 눈썹을 도려내어 폐하의 창가에 초승달로 걸어두었던 걸 아시는지요 삼남의 지평선을 수거해 다림질한 이후에 침소의 휘장으로 걸었던 것도요// 전쟁이 날 때마다 소금쟁이들이 연못 위에 빗금을 그었습니다 말발굽의 편자를 갈아 끼우는 일도 무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적적하여 밤하늘 한쪽을 몰래 떼어내 솜으로 뭉쳐 먹통에 넣었던 겁니다/ 돌 위에 먹줄을 튀겨 당신과 상통하는 것으로 삼을까 합니다// 먹줄을 남긴들 세간의 학자들은 기둥을 세우려고 그었거니 하겠지요마는 마음 놓으세요 묵두(墨斗)는 태워 멸하였으니 당신은 허공과 나란히 불멸하시기 바랍니다 기해년 정월 스무아흐렛날"('익산미륵사지서탑금제사리봉안기益山彌勒寺址西塔金製舍利奉安記')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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