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한 인간들의 세상

조용호 / 기사승인 : 2021-01-15 11:4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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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수 중단편 모음집 '우리가 진심으로 엮일 때'
서로 오해하며 살아갈 뿐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
비난하면서 닮아가며 속고 속이는 인간들의 희비극
"다른 장소에서는 다른 얼굴, 평판이란 환상에 불과"

"그녀는 상습적으로 거짓말한다. 밥 먹듯 숨을 쉬듯 지극히 평온한 얼굴로. 십 분이 지나면 들통날 거짓말을 하는데 들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부지불식간에 새어나오는 거짓말은 본인이 제어하지 못하는 사이에 점차 반경을 넓히며 스스로 영토를 확장해간다. …그녀는 거짓말로 생의 에너지를 얻고 활기를 되찾는 눈치다. 자기가 하는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고 있으므로 리플리 증후군과도 약간 다르다."

'리플리 증후군'이란 스스로 지어낸 거짓말을 믿어버리는 정신적 상태에 대한 신조어로 알려져 있다. 부자인 고교 동창생을 죽이고 그 사람 신분을 빌려 범죄를 벌이는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 씨'에서 유래됐다. 소설가 이현수는 중단편을 모은 소설집으로는 11년 만에 선보인 '우리가 진심으로 엮일 때'(문학동네) 첫머리 단편 '리플리 부인'에서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여성을 등장시킨다. 

▲'장미나무 식기장' 이후 11년 만에 중단편 모음집을 펴낸 소설가 이현수. 그는 "돌아보니 오해에 대해서 쓰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완전한 악은 없다"고 말했다. [문학동네 제공] 


중소도시 의류매장 사장인 그 여성은 65세라곤 믿겨지지 않는 아름다운 비주얼이다. 숙식 제공이 필요해 서울에서 내려와 취업한 여성 화자는 정하연이라는 그 사장의 거짓말에 넌더리가 난다. 사장은 자기가 소싯적에 얼마나 예뻤는지 일화를 지루하게 늘어놓은 뒤 거짓말의 세계로 슬쩍 넘어간다. 유명한 디자이너 몽드레 박이 가까운 선배였고, 모델계의 전설 도민우가 자신을 얼마나 따라다녔는지 줄줄이 늘어놓지만 여자는 믿지 않는다. 싸구려 원단으로 만든 기획 상품을 정품으로 속여 팔다 입씨름을 하는 건 다반사다.

 

"6월의 녹음처럼 칠칠한 그녀의 거짓말은 무사의 칼처럼 가볍고 날래어 어느 곳을 찌르고 들어올지 알 수 없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감쪽같이 상대를 제압하니까. …리플리 부인은 단단히 응축된 고약 덩어리 같았고 그 검은 기운에 물이 들까봐 나는 먼 곳으로 튈 예정이었다."

 

여자는 그 사장이 자기 자신과 친하게 지내지 못하는 부류의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임자가 인수인계를 하면서 사장을 조심하라고 했던 말을 곱씹으며 자신도 더 이상 그곳에 머물다가는 월급조차 떼일 것 같아 벗어날 궁리를 하면서 한편으로 그 사장의 정체를 탐색한다. 정하연이라는 이름은 가짜였고, 다시 튀어나온 정혜경 또한 본명이 아니었다. 마지막에 드러난 이름은 정복순. 놀랍게도 정복순의 이력은 사장이 읊은 과거사와 일치했다. 

 

"그녀는 왜 내게 참말을 거짓말처럼 했던 것일까? 내가 거짓이라고 확신했던 말은 전부 진실이었다. …회초리 같은 다리를 가진 수줍은 그녀, 뾰족한 하이힐로 미싱사의 뒤통수를 까는 그녀, 재단대에 누워 양철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그녀, 구제 옷을 매장의 정품으로 둔갑시키는 그녀, 돈 많고 빨리 죽을 영감을 고르는 그녀."

이어지는 중편 '마리나 나의 마리나'에도 속을 알 수 없는 여성 캐릭터 '민자 씨'가 등장한다. 바다로 이어진 호수의 경관 좋은 매립지를 불하받은 민자 씨. 그녀는 이곳에 요트와 모터보트 등을 정박할 수 있는 마리나를 건설하려고 하지만 대기업과 이미 여수에서 마리나 사업을 하고 있는 노련한 박 사장이 개입해 쉽지 않다. 곡절 끝에 대기업을 물리치고 마리나 사업권을 확보한 민자 씨가 사업신청서 작성을 미끼로 자신에게 접근해 투자를 받아낸 것이라고 영숙 씨는 의심한다. 딸 우희의 결혼자금까지 털어넣은 영숙 씨가 보기에 민자 씨의 무기는 '탁한 눈과 굽은 등'에 속셈을 숨기고 누가 뭐래도 버티어 내는 것이다. 민자 씨는 말한다.

"우희 엄마도 내가 미덥지 않죠. 꼬부랑 할머니 같은 여자가 사업을 제대로 할까 의심쩍죠. 그래서 시청 직원이 구박하는 거예요. 여기서 흙일을 하다 말고 시청에 달려가곤 했으니 내 꼴이 우습게 보였겠죠. 그래도 난 끝까지 버틸 거예요. 그거 생각보다 쉬워요. 누가 뭐라든 가만히 있으면 되거든요."

 

마리나가 돈 먹는 하마가 되면서 영숙 씨는 죽은 남편이 애써 모아놓은 전 재산은 물론 딸의 결혼자금까지 날릴 처지에 놓인다. 영숙 씨는 이제 민자 씨가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접근한 '졸음에 겨운 눈을 슴벅이는 가련한 고양이가 아니라 삵'이라고 생각한다. 영숙 씨는 '선량한 듯 선량하지 않았고 깨끗한 체하면서도 추한' 사촌오빠를 동원해 민자 씨의 수법을 그대로 베껴 되치기를 하려고 한다.


이현수는 이번에 함께 펴낸 개정판 첫 소설집 '토란'이나 텔레비전 드라마로 방영된 '신기생뎐' 같은 소설들을 통해 고아한 문체로 근현대의 삶을 웅숭깊게 그려낸 작가로 호가 높다. 이현수는 "우리시대에 선한 사람이라고 평판을 얻은 사람이 과연 선한 사람일까, 평판이라는 게 믿을 만한 가치가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떠나질 않았다"면서 "다른 장소에서는 다른 얼굴일 수 있는데 평판이란 환상에 불과한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 질문들에 대한 생각을 이번 소설집에서는 정복순과 김민자라는 인물을 통해 드러낸 셈이다.


이어지는 단편 '돈의 수사학'에는 서문시장에서 부를 쌓은 노인 '조'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조는 자신이 탐욕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방법이 남다를 뿐이다. 돈을 귀중하게 여기라는 무학인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들어 물려받은 지물포를 운영하는 한편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군복을 팔아 부를 일구었다. 자식들이 문제다. 큰사위는 사업을 한다고 여러번 자신의 돈을 탕진했는데 딸은 여전히 남편을 더 지원하지 않는다고 원망한다. 손자 찬이는 카페를 하겠다고 손을 벌리지만 '호박도 똥거름 위에서 굵어지는 법'이라는 할아버지가 고깝기만 하다. 작은딸은 강남에서 클리닉을 운영하며 고가의 의료장비 타령이다. 119구급대원을 다급하게 부르는 손자 찬이의 목소리 끝에 희미하게 따라붙었던 작은 소리를 조는 들어버렸다.
"영감, 존나 기 빨리게 하더니……."

이현수는 이 세 편의 중단편들은 인간에 대한 탐구이면서 모두 '돈'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는 "현대를 말하려다보니 돈을 빼고는 어려웠다"면서 "우리나라에 돈에 관한 책이 그렇게 많은지 이번에 처음 알았다"고 덧붙였다. 마지막 두 편은 이현수가 노근리의 참극을 다룬 장편 '나흘'(2013)에서 다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담은 연작이다.

미군의 폭격으로 민간인들이 살상당했던 충북 영동군 노근리 이웃 동네 신촌리가 이현수의 고향이다. 그는 표제작으로 뽑은 '우리가 진심으로 엮일 때'에서 열네 살 소년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주었던 여자를 찾는 노인을 등장시킨다. 정부를 믿고 피난을 포기했다가 대전역 앞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던 부모는 잿더미 속에 죽고 소년은 졸지에 고아가 됐다. 소년이 피를 쏟으며 죽어가는 사람들 틈에서 살아나 노근리 쌍굴 밖으로 기어 나왔을 때 서인영 모녀가 손을 내밀었다. 화전을 일구던 그들 집에 얹혀 있다가 허기를 해결하기 위해 동네 청년들과 지리산에 입산한 뒤 경찰에 체포, 사회안전법까지 합쳐 이십칠 년을 감옥에서 살다 나왔다. 

▲이현수는 "인간은 보고 싶은대로 본다는 말을 책상 앞에 붙여놓고 썼다"고 말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그가 서인영 모녀를 찾아 시니어타운을 찾는 이야기에 이어 '천사는 이렇게 탄생한다'에는 그 노인을 맞는 은주의 이야기가 함께 진설된다. 늘 찌푸리고 지내던 은주는 왜 자신이 요양원을 찾아온 그 남자를 살갑게 대했는지 돌아보다가 '자신의 삶을 오로지 홀로 구축하고 이룩한 사람의 눈' 때문이었다고 깨닫는다. 은주는 아홉 살 때부터 유일한 보호자인 엄마를 돌보았고, 그 나이에 벌써 불가능성에 대한 공포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노인 또한 은주의 눈에서 그것을 읽었다. 

 

"노인이 직접 은주를 지목한 것은 그녀의 눈에서 상실을 읽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노인을 단번에 읽어버린 것처럼. 삶의 연결성이 없는 사람들, 잎맥 같은 가느다란 길마저 중간 지점에서 뚝뚝 끊기는 사람들의 눈 속에는 숨은 공간이 하나씩 있게 마련이다. 빛이 잠시 머물다 사라진, 이삿짐을 하루 먼저 빼버린 방 같은 그런 공간. 오직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만이 그걸 알아볼 수 있다."

 

이현수는 "책의 앞쪽에 놓인 중단편은 시대를 말해야 한다는 욕구와 그것과는 무관하게 움직이고 싶다는 내면적 갈등에 휩싸인 채로 썼다"면서 "묶고 보니 소설집 한 권에 단편과 중편, 연작까지 고루 섞여 있다"고 돌아보았다. 전화로 만난 이현수는 "지금은 마지막 내시가 바라본 고종 이야기를 담은 구한말 시대 배경 장편을 준비하는 중"이라며 "올해 말 탈고하면 내년 쯤 나올 것"이라고 밝혔다. 이현수의 진중하고 치밀한 문체에 실릴 조선의 마지막 이야기가 기대된다.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 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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