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의 '고난의 행군'은 '폭망'의 지름길

김당 / 기사승인 : 2021-04-20 17: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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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톺아보기] 17. '고난의 행군 결심' 발언의 행간에 숨은 뜻
'고난의 행군'은 김정은 아킬레스건…'고난의 행군 결심'은 립서비스
北 '고난의 행군 세대'는 '잃어버린 세대'…노동당보다 '장마당' 선호

어라, 이것 봐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가 지난 8일 제6차 노동당 세포비서대회 폐회사에서 "'고난의 행군'을 할 것을 결심했다"고 밝혔다는 보도를 접한 첫 느낌은 한 마디로 '뜻밖'이었다. 북한 관영매체에서 발언록을 찾아보니 김정은은 이렇게 말했다.

 

▲ 4월 8일 제6차 세포비서대회에서 폐회사를 하는 김정은 노동당 총비서 [조선중앙통신 캡처]


"우리 당을 어머니당으로 믿고 따르면서 자기 당을 지키려고 수십년 세월 모진 고난을 겪어온 인민들의 고생을 이제는 하나라도 덜어주고 우리 인민에게 최대한의 물질문화적 복리를 안겨주기 위하여 나는 당중앙위원회로부터 시작하여 각급 당조직들, 전당의 세포비서들이 더욱 간고한 '고난의 행군'을 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김정은은 "우리는 그 어디에 기대를 걸거나 바라볼 것도 없으며 오직 수백만 노동당원들, 특히 수십만 당세포비서동지들의 심장을 믿을 뿐"이라면서 '고난의 행군 결심'을 언급했다. 인용부호(원문은 《고난의 행군》)로 표시한 것을 보면 일반 보통명사가 아닌 특정한 고유명사로서의 '고난의 행군'을 지칭한 것이었다.

 

김정은이 '고난의 행군'을 입에 올린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김정은은 앞서 2016년 5월 제7차 당대회에서 한 중앙위원회 사업총화보고에서 '고난의 행군'을 3번 언급했다. 하지만 뉘앙스는 달랐다. 3번 모두 인용부호를 사용하지 않고 보통명사처럼 언급했다.

 

김정은은 사업총화보고에서 1990년대 중후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경제봉쇄와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시련과 난관을 겪게 되었다면서 "우리 인민은 역사에 유례없는 고난의 행군, 강행군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언급했다. 다른 한번은 "고난의 행군시기처럼"이라고 그 시절을 지칭했고, 다른 한번은 "고난의 행군, 강행군을 승리적으로 결속하였"다고 언급했다.

 

그런데 이번 세포비서대회에선 "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시작해 각급 당 조직들, 전당의 세포비서들이 더욱 간고한 '고난의 행군'을 할 것을 결심했다"고 언급한 것이다. 5년 전 7차 당대회에서의 언급이 '고난의 행군' 시기를 회상한 것이라면, 이번 세포비서대회에서의 언급은 '고난의 행군 결심'에 방점이 찍힌 것이므로 무게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대다수 전문가들이 김정은의 '고난의 행군 결심' 발언에 대해 "외부에서 보기보다 북한 내부 사정이 훨씬 더 심각함을 반영한 것"이라거나, "대북 제재가 장기화하는 가운데 외부 환경 변화를 기대하지 않고 자력갱생을 위한 내부 조이기를 더 강화하겠다는 의미"로 풀이한 것은 자연스런 접근이다.

 

▲ 북한의 1900여개 단체 8만4천여명이 노동신문에 실린 김정은 위원장의 "백두산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한 마디에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 답사에 나서 혹한의 칼바람을 맞으며 '극한 체험학습'을 해야 했다. [조선중앙통신 캡처]


하지만 이는 평면적이고 단절적인 분석이다. 북한에서 최고지도자의 발언은 교시(敎示), 어록, 노작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되어 인민에게 교양자료로 활용된다. 실제로 수백만 당원들은 김정은 발언이 실린 노동신문 기사를 밑줄 치면서 학습한다. 이번 세포비서대회에서 한 '강령적인 결론'에서도 김정은은 그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당세포들에서는 당보학습을 중시하고 정상화하여야 합니다. 당보에는 시기적으로 제시되는 당의 로선과 정책들이 다 반영됩니다. 매일 《로동신문》 독보를 제도화하고 사설을 비롯한 중요기사들에 대한 학습을 강화하여 당원들과 근로자들이 당의 사상과 의도를 제때에 정확히 알게 하여야 합니다." (《현시기 당세포강화에서 나서는 중요과업에 대하여》)

 

그런데 김정은이 '고난의 행군 결심' 발언을 한지가 10여일이 지났지만 교시∙어록∙노작으로 변주되지도 않고, 심지어 노동신문의 후속 보도도 나오지 않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북한은 이태 전에 김정은이 군마를 타고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들을 돌아보며 "혁명의 지휘성원들은 백두산혁명전적지 답사를 통한 '백두산대학'을 나와야 한다"는 한마디에 그해 겨울 1900여개 단체 8만4천여명이 영하 30도의 혹한에 백두산 칼바람을 맞으며 '극한 체험학습'을 했던 전체주의 국가이다.

 

어디 그뿐인가. 지난해 9월에는 김정은이 수도당원사단을 꾸려 함경도 수해복구현장으로 가달라는 친필서한을 공개한 지 사흘만에 평양시 당원 70만명이 자원하고 정예당원 1만2000명이 제1·2수도당원사단 출범 궐기대회를 갖고 신속하게 현장으로 달려갔다.

 

이처럼 최고지도자의 교시나 편지가 법보다 우선하는 전체주의 국가에서 김정은이 '고난의 행군 결심'을 했는데도 고난의 행군 소식이 들리지 않는 것은 이상하지 않는가? 하지만 충분히 예상된 일이다. 왜냐고?

 

북한에서 노동신문이나 중앙통신의 중요 논조나 보도는 죄다 당 선전선동부의 지침에 따른 것이다. 즉 '고난의 행군 결심' 발언에 대한 추가 보도를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김정은이 비록 '고난의 행군 결심' 발언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원들에게만 그 의도를 알게 할 뿐이고 이를 선전선동으로 널리 확산시키지는 않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고난의 행군'은 김정은의 아킬레스건이기 때문이다. 또한 북한 주민이라면 '고난의 행군'이 김정은의 최대 핸디캡(약점)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교시와는 달리 아무도 나서서 '고난의 행군 결심' 발언을 선전하지도 칭송하지도 않는 것이다.

 

▲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보도한 유년기의 김정은과 생모 고용희 [마이니치신문 캡처]


알다시피 '고난의 행군' 시기인 1996년에 12살이었던 김정은과 형 김정철, 여동생 김여정 3남매는 재일교포 무용수 출신 생모 고용희의 보살핌 속에서 스위스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정철은 '박철'이라는 가명으로 베른국제학교에 다녔고, 정은은 '박운'이라는 가명으로 다른 공립학교에 다녔다.

 

고용희는 신분을 감추려고 스위스 제네바 주재 북한대표부 외교관 '손정일'의 여권을 사용했으나 스위스 정보당국은 고씨가 북한 외교관들은 다니지 않는 취리히의 반호프슈트라쎄 명품 쇼핑가에 자주 드나드는 것을 보면서 일반 외교관이 아니라고 판단해 면밀히 주시했다고 한다.

 

스위스에서 김정은 형제를 돌보다가 1998년 미국으로 망명한 고용숙(고용희의 어니)의 언론 인터뷰에 따르면, 고용희는 3남매의 유학 시절에 프랑스 파리의 유명한 유희장인 '유로 디즈니랜드', 스위스 알프스의 스키장, 프랑스령 리비에라 해수욕장, 이탈리아의 알레프스코 레스토랑 등에 자주 데리고 다니면서 서방문화를 경험해보게 했다.

 

미국 CIA 분석관 출신으로 바이든 행정부에서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차관보로 대북정책을 검토하고 있는 한국계 정 박(JUNG H. PAK, 한국명 박정현)은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 시절인 2018년 2월에 발표한 '김정은의 교육'에서 "어려움에 단련된 그의 조상들에 비하여 김정은은 사치와 특권에 보호되면서 자랐다"면서 이렇게 분석했다.

 

▲ 스위스 베른 유학 시절의 김정은(맨뒷줄 가운데)과 급우들 [PBS '프론트라인' 캡처]


"1990년대 대기근 동안 약 2~3백만 북한 주민이 아사와 굶주림 관련 질병으로 죽어갈 때 김정은은 스위스에 있었다
. 그의 어린 시절은 사치스러웠고 편안했다: 말이 있는 큰 저택, 수영장, 볼링장, 개인 별장에서의 여름, 7살짜리가 운전할 수 있게 고친 고급 승용차. 김정은에게 스위스 알프스에서 스키를 타고 프랑스 리비에라 해변에서 수영하는 것은 타고난 특권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고난의 행군' 시기에 유럽에서 근무한 태영호 의원(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에 따르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자 외교적 비중이 작은 대사관들을 철수시키라고 하면서 당에서 외무성 예산을 보장해줄 수 없으니 자체적으로 생존 방도를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북한 재외공관들이 마약∙술∙담배 매매 같은 불법활동을 통해 돈벌이를 하다가 발각되는 사례가 잦아진 것도 이때이다.

 

김정은의 폭압정치가 한창인 2015년 10월 이병호 원장 시절에 국정원은 국회 정보위에서 당시 김정은 체제에 대해 "체제가 취약하긴 하나 리더십은 발휘가 되고 있다"면서 이렇게 답변했다.

 

"과거에는 수령에 대한 충성심이 컸는데 점점 돈에 대한 충성심으로 바뀌고 있다. 북한 주민들 사이에 '조선에는 당이 2개 있다. 장마당은 이익이 되는데 노동당은 이익이 안 된다'는 말이 떠돌고 있다."

 

북한에 오늘과 같은 '장마당'이 형성된 것도 '고난의 행군'을 겪던 1990년대 말이다. 대다수 북한 주민들과 김정은과 비슷한 또래의 10대들이 기아에 허덕일 때 김정은은 스위스에서 스키를 타고 프랑스 해변에서 수영을 즐기는 호화로운 조기유학 생활을 했다. 북한에서 김정은과 연관된 '고난의 행군'은 사실상 '금기어'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흔히 1980년대 초반~2000년대 초반 출생한 세대를 밀레니얼 세대(Millennials)라고 부른다. 밀레니얼 세대는 정보기술(IT)에 능통하며 대학 진학률이 높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회에 진출해 고용 감소와 일자리 질 저하 등의 어려움을 겪은 세대이기도 하다.

 

한국에 밀레니얼 세대가 있다면 북한에는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자란 '장마당 세대'가 있다. 장마당 세대는 국가의 배급이 아니라 온가족이 장마당에서 돈을 벌어 먹고 사는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당과 국가에 대한 충성도가 이전 배급세대보다 현저하게 약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장마당 세대의 인구학적 비중과 사회적 영향력이 커질수록 국제제재와 경제위기에 따른 체제 이완이 생기고 김정은 유일지배체제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정은이 이번 세포비서대회에서 '반사회주의 또는 비사회주의와의 투쟁'을 강조하면서 특히 청년들의 사상 통제가 "최중대사"이고 "조국과 인민의 사활이 걸린 문제"라며 옷차림부터 언행까지 세세하게 통제할 것을 주문한 것도 그런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 2017년 5월 아주대학교에서 열린 '2017 와글바글 장마당'에서 학생들이 북한 장마당에서 두부를 훔쳐 먹는 꽃제비를 재연하고 있다. 이 행사는 아주대와 아주대통일연구소, 남북 청소년들이 만든 북한 인권단체 나우(NAUH)가 공동주관 했으며, 장마당을 그대로 재연한 북한 화폐와 의복, 술, 교과서 등이 전시됐다. [뉴시스]


"지금 우리 청년들의 건전한 성장과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 적지 않고 새세대들의 사상정신상태에서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현실은 청년들을 늘 옆에 끼고 있는 당세포들이 청년교양에 보다 큰 힘을 넣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전당의 당세포들은 오늘날 청년교양문제를 당과 혁명, 조국과 인민의 사활이 걸린 문제, 더는 수수방관할 수 없는 운명적인 문제로 받아들이고 이 사업에 품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 평화연구소(USIP)는 지난해 1월 말 워싱턴에서 '북한의 잃어버린 세대(#NKLostGeneration): 1990~2018년 북한 어린이의 건강과 인권'을 주제로 토론회를 가졌다. 연구소는 북핵 위협에 대한 우려 속에 현재 진행 중인 인도주의적 위기의 가장 취약한 피해자인 북한 아동들의 건강과 인권은 간과되고 있다면서 공중보건과 인권이란 렌즈를 통해 오늘날 북한에 대한 인권과 인도적 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북한의 잃어버린 세대는 김정은과 동시대에 태어났지만 '고난의 행군' 시기에 전혀 딴 세상에 살았던 '장마당 세대'와도 겹친다. 김정은이 세포비서대회에서 옷차림부터 언행까지 장마당 세대를 잡도리할 것을 지시하고 '고난의 행군 결심'을 교시했음에도 노동신문이 더는 '고난의 행군 결심'을 선전하지 않는 것도 김정은의 아킬레스건이 부각되는 것을 우려해서다.

 

요컨대 김정은의 '고난의 행군 결심'은 '립서비스'일 뿐이지 실행할 수 없는 아킬레스건이다. 노동당보다 장마당을 선호하는 '고난의 행군 세대'에게 더 간고한 고난을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김정은에게 '폭망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 김정은 체제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장마당 세대를 키운 '시장'이기 때문이다.

UPI뉴스 / 김당 대기자 dangk@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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