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진수성찬은 말짱 다 뒷전에 숨은 완장들 차지여!"

조용호 / 기사승인 : 2021-10-01 17:3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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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계절에 돌아본 윤흥길 '완장'의 숨은 의미와 무대
'백산저수지' 배경으로 권력에 대한 질펀한 풍자와 해학
박정희 전 대통령 기리던 저수지 비석도 빛바랜 완장 신세
"권력뿐 아니라, 땅도 돈도 지체나 명예도 말짱 다 완장이여"

"나도 알어! 눈에 뵈는 완장은 기중 벨볼일없는 하빠리들이나 차는 게여! 진짜배기 완장은 눈에 뵈지도 않어! 자기는 지서장이나 면장 군수가 완장 차는 꼴 봤어? 권력 중에서도 아무 실속없이 넘들이 흘린 뿌시레기나 주워먹는 핫질 중에 핫질이 바로 완장인 게여! 진수성찬은 말짱 다 뒷전에 숨어서 눈에 뵈지도 않는 완장들 차지란 말여! 우리 둘이서 힘만 합친다면 자기는 앞으로 진짜배기 완장도 찰 수가 있단 말여!"

▲전두환 정권의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치욕을 겪고난 뒤 펴낸 윤흥길의 '완장'은 1969년 호남야산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축조된 전북 김제시 백산저수지를 배경으로 삼았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화천대유(火天大有), 천화동인(天火同人)… 하늘의 도움으로 천하를 얻고, 사람들이 힘을 하나로 합쳐 뜻을 이룬다는 주역의 좋은 말들이 '완장'으로 다가오는 이즈음이다. 이 훌륭한 주역의 괘를 표방한 법인이 필부들에게는 처음부터 '완장'으로 인식되기는 쉽지 않지만, 눈 밝은 이들은 권력자들이 힘을 합친 집단이라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을 터이다. '완장'의 여자 김부월의 언급처럼 '진수성찬은 말짱 다 뒷전에 숨어서 눈에 뵈지도 않는 완장들 차지'라는 사실 말이다.

정치의 계절이 깊어가고 있다. 권력을 잡기 위한, 가장 화려한 완장을 차기 위한 쟁탈전이 좌충우돌 뜨겁게 달아오르는 국면이다. 이런 계절이면 자주 거론되는 장편 '완장'은 일찍이 드라마(1989)로도 방영됐고, 정치인들이 여야 좌우 가리지 않고 제논에 물대기 식으로 인용하곤 해서 다 읽은 듯한 착각을 할 수도 있지만, 정작 만만치 않은 두께의  이 장편을 활자로 접하면 그 의미와 재미는 더 깊고 쏠쏠하다. 이제 원로 반열에 들어선 윤흥길(79)이 '완장'의 무대로 삼았던 공간을 둘러보고, 이 작품을 새삼스럽게 톺아보는 이유다. 

'완장'이 세상에 나온 시점은 1983년. 윤흥길은 1980년 전두환의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갔다. 특별한 죄가 있었다기보다 당시 지식인들을 맹목적으로 그물로 휩쓸 듯이 잡아가 '군기'를 잡던 맥락이었다. 그는 합수부에 들어가 3박4일 동안 '자서전' 세 권을 쓰고 나왔다고 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때까지 살아온 행적을 다 쓰라는 것인데, 밤새 다 쓰고 아침에 제출하면 다시 쓰라고 하고, 이전 것과 비교해 조금이라도 빠지거나 덧붙이는 내용이 나오면 왜 거짓말 하냐고 집중적으로 욕하고 발로 차고 권력의 폭력을 휘둘렀다고 한다. 그가 느낀 모멸감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는 자신이 맞설 수 있는 무기는 소설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고, 그 결실로 나온 작품이 질펀한 풍자와 해학으로 감싼 '완장'이다.

▲'완장'을 찬 임종술은 과도하게 저수지 감독 임무를 수행한다. 해질녘 백산저수지 낚시꾼과 경고판.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완장'의 주인공은 임종술이라는, 도시에서 각종 잡스러운 일을 하다가 감옥 신세까지 지고 귀향한 고집 세고 힘 좋은 왈패 사내다. 부동산으로 돈을 번 졸부 최 사장이 드넓은 저수지 사용권을 따낸 뒤 양어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다른 이들이 낚시를 못하도록 감시할 감독으로 임종술을 선택한다. 이 작품에서 임종술 못지않게 내내 중요한 배역을 수행하는 '저수지'는 박정희 대통령이 역점사업으로 추진한 호남야산개발 당시 축조한 전북 김제시 백산면의 '백산저수지'가 모델이다.

 

이 저수지는 섬진강댐 방류수를 퍼올려 물을 끌어온 '양수 저수지'로 빗물에 의존했던 천수답들이 안전하게 농사를 짓게 됐고, 인근에는 뽕나무 단지를 조성해 국내 최대의 잠사공장도 들어섰다. 소설에서는 '판금(板琴) 저수지'라고 명명했지만 뽕나무 단지가 묘사된 경관은 백산 저수지 풍광을 그대로 드러낸다. '뽕나무 단지로 개간된 밋밋한 구릉을 양쪽으로 거느린 채 저수지는 눈이 가물가물해질 때까지 북쪽을 향해 굽이굽이 달리다가는 앞길을 가로막는 법계리의 달만산을 보고 갑자기 끼익 소리를 내면서 멈추는 것이었다.'

어려서부터 대처로만 떠돌면서 쌈질로 잔뼈가 굵은 임종술이 처음에는 저수지 감독이라는 자리 권유에 시큰둥하다가, 완장이라는 말 한마디에 허망하게 무너진다. 대처에서 돈을 벌어보려고 몸부림을 치는 그의 노력 앞에는 언제나 완장들이 도사리고 있어서 한이 맺혔던 터였다. 종술은 왼팔에 노란 바탕에 파란 글씨로 새긴 '감독'을 세 개의 빨간 가로줄이 좌우에서 받들고 있는 비닐완장을 차고 지나치게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한다. 외지에서 놀러와 텐트를 치는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들 하나 중학교에 보내기 위해 밤에 몰래 고기를 잡던 가난한 부자도 곤욕을 당한다. 도둑질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아들을 학교에 보내려는 친구를 보면서 종술이는 깨닫는다.

 

"권력 한 가지가 다는 아니여. 땅도 완장이여. 돈도 완장이고 지체나 명예도 말짱 다 완장이여."

 

종술에게는 남들로부터 부러움을 사는 것, 남들을 큰소리로 부리고 남들 앞에서 마냥 뻐겨댈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다 완장이었다. 이 세상에는 빛깔 다르고 소리와 냄새도 다른 수많은 완장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급기야 종술을 감독으로 임명한 최 사장 일행의 낚시까지 막아서면서 그는 파면당하지만, 이제 그는 누구의 임명도 아랑곳하지 않고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관성으로 저수지 감독에 나선다. 

▲임종술과 김부월의 사랑놀음은 질펀한 해학으로 한껏 흥미를 돋운다. 한적한 백산저수지의 오리배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완장'을 밑천으로 '실비집'의 여자 김부월에게 추파를 던지지만, 만만치 않은 풍상을 겪어온 그 여자가 쉽게 넘어오지 않아 애가 탄다. 어렵사리 부월이와 저수지 텐트에서 몸을 섞는데 이 여자, 그만 절정에서 엉뚱하게도 '마 선상님'을 외친다. 부월이가 학창시절 짝사랑했다가 가출한 뒤 술집을 전전하게 만든 문제의 그 선생이 하필 남자들과 절정에 이를 때면 꼭 튀어나오곤 해서 자신도 한탄하는 그 이름이다. 종술이가 징역을 사는 동안 마누라는 딸 하나 시어미에게 남겨두고 야산개발 측량기사 보조원과 눈이 맞아 달아나버린 터여서, 엉뚱하게 방사를 치르는 중에 다른 남자 이름을 부르는 부월이에게 종술은 만정이 떨어진다. 윤흥길의 해학이 돋보이는 그 대목.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장쾌한 폭력을 태운 채로 부월이는 끙끙 앓는 소리를 토하기 시작했다. 기우는 배처럼 그니는 급격히 균형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니의 고물이 물에 잠겼다. 그니의 갑판이 물에 잠기고, 이물도 물에 잠겼다. 마지막으로 돛대 끝이 물에 잠기면서 그니는 완전한 침몰의 순간을 맞았다. 침몰하는 고단한 현재를 거슬러, 침몰하는 욕된 과거를 허위단심 거슬러 그니는 자신의 순결했던 시절의 밑바닥으로 뽀골뽀골 가라앉았다. 그니는 천지가 온통 설원처럼 새하얗게 표백되는 기분을 맛보았다. 새하얗게 변한 과거 속을 흔들리는 해초처럼 사뭇 부대끼며 떠밀리다가 그니는 마침내 절정의 순간을 맞게 되었다. '마 선상님!'"

'완장'에서 유일하게 임종술이 꼼짝 못하는 국민학교 때 담임 진돗개 선생의 호통. "종술이는 듣거라. 본시 우리 나라는 완장이란 게 없었느니라. 예로부터 우리가 팔에다 차는 게 있었다면 그것은 삼베로 맨든 상장 정도가 다였느니라. 상장이 어떤 것인지 너는 아느냐? 죄인이라는 증거다. 집안 어르신을 돌아가시게 맨든 죄를 만천하에 자복허는 뜻으로다가 사람들은 상장을 둘렀다. 죄인이 부정을 멀리허고 매사에 근신허게코롬 상장을 둘리워서 일반인들허고 확연허니 구분을 지었다. 본시 우리가 조상님네로부터 물려받은 완장은 이렇게 미풍양속에서 시작된 것이니라." 저수지 물을 빼버리면 '완장'의 바탕이 완전히 무너진다는 사실에 광분하는 종술이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미친놈처럼 소리를 지른다. "완장허고 상장허고 맞바꾸자아! 죽어서 구신으로 남어서라도 내 저수지 내가 지킬란다아!"

▲백산저수지는 한때 낚시꾼들이 많이 찾는 곳으로 이름을 날렸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서푼짜리 권력에 취해 그의 아비처럼 죽게 될까봐 종술의 모친 운암댁은 노심초사한다. 운암댁의 남편은 일제 때 그를 일경에 밀고해 모진 고문 끝에 팔 하나를 잃었고,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 완장을 차고 그를 밀고한 박가를 찾아내  공개적으로 때려 죽였다. 다시 판이 바뀌자 이번에는 박가의 편에 선 사람들이 남편을 찾아 눈에 불을 켜는 바람에 종술이 하나 데리고 도망쳐 이곳 저수지 마을에 정착한 터였다. 이런 업을 운암댁 아들이 고스란히 반복하는 듯하여서, 그네는 부월이에게 통사정을 하여 가뭄에 저수지 물문을 여는 것까지 막고 나선 종술이를 데리고 도시로 나가도록 주선했다.

 

전북 김제시에서 익산시 쪽으로 6km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백산저수지는 지평선 아래로 기우는 해의 빛을 받아 뿌옇게 누워있었다. 백산저수지는 붕어·잉어·향어 등 대어들이 많이 나와 낚시꾼들에게 사랑받았지만 서양종인 배스가 유입되면서 어자원이 급속히 줄어 한동안 외면당했다. 이곳은 '관망대 저수지'로도 불리는데, 1969년 호남야산개발사업 준공식 때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참석하면서 건설된 관망대에 오르면, 저수지와 금만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석양녘 금만경 평야를 배경으로 백산저수지가 고즈넉이 누워 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석양녘에 찾은 두악산 관망대 계단 입구에서 발견한 철제 입간판에는 "두악산은 호남야산개발사업에 착수하면서 고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여 기공식 했던 산으로 정상에 전망대를 세웠다"는 글귀가 적혀 있다. 지금은 이처럼 간단한 내용으로 바뀌었지만, 2015년에는 육사 출신 김제시장이 박정희 대통령 업적을 기리는 화강암 비석을 세워 시민단체들의 항의를 받았다. 그 비석에는 "1966년 9월 21일 한눈에 금만경 평야를 볼 수 있는 이곳 두악산에서 열린 호남 야산 개발 사업 기공식에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참석하시어 우리 김제의 번영을 염원하시었다"고 새겨져 있었다. 이 비석에 새겨진 글귀 중 '하시었다'는 대목이 특히 지탄을 받았다.

큰 권력의 힘이 아니면 축조하기 어려운 토목공사로 탄생한 곳이 백산저수지인만큼, 윤흥길이 이곳을 배경으로 '완장'을 집필한 것도 적절한 선택이었던 셈이다. 김부월은 사내를 서넛씩 바꾸다가 임종술과 또다시 눈이 맞아 수양어머니의 패물과 돈을 훔쳐 서울로 임종술과 함께 야반도주했다. 윤흥길의 표현을 따르자면 이들 부부는 한마디로 '잡놈'과 '잡년'인데, '완장' 후속편으로 펴낸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에서 이들은 서울 변두리 산동네 판잣집에 터를 잡은 뒤 한동안 깨가 쏟아졌지만 훔쳐온 돈이 소진되자 갖은 궂은일에 다 뛰어들다가, 세끼 밥먹기가 녹록하지 않음을 깨닫고 절망해 한강변에 나가 자살행각을 벌인다. 윤흥길은 임종술과 김부월을 두고 "머리가 상당히 모자라는 편이어서 제아무리 똑똑한 척 해봤자 제 꾀에 제가 넘어가 번번이 손해만 보고 제 아무리 불량을 떨어봤자 근본적으로 순박하게 타고난 천성은 감출 수 없다"고 말했다.

▲'장마' '완장'의 작가 윤흥길. [한국문학번역원 제공]


'완장' 제4판 서문에서 윤흥길은 "여가 야를, 야가 여를 꾸짖고 보수가 진보를, 진보가 보수를 비판하려는 정치적 의도 하에 내 소설을 임의로 차용하는 기현상이 눈에 띈다"면서 "한 편의 해학소설을 통해 꾀죄죄한 가짜 권력의 떠세하는 행태를 그려 보임으로써 진짜배기 거대권력의 무자비한 속성을 끄집어 들어내고자 했던 내 창작 의도에서 한참 멀리 벗어나 때로는 주객이 전도되거나 때로는 아전인수로 사용되는, 웃지 못할 사례들"이라고 질타했다. 차라리 눈에 보이는 완장이라도 차던 시절이 더 나았을까. 임종술이 자신의 완장을 대신 떠맡은 동네 남자에게 충고하는 말. 

"자네도 한번 맛을 들인 담부터는 완장이란 것이 어떤 물견인지 알게 될 것이네. 완장이 없으면은 어떤 놈이 권력 있는 놈이고 어떤 놈이 권력 없는 놈인지 사람들이 알아먹을 수가 있어야지. 그렇기 땜시 세상에서는 표시가 나라고 완장 같은 물건을 맨들어서 권력을 분간허게코롬 규칙을 정헌다네. 똑같은 사람이면서 누가 누구 머리 우에 서고 누가 누구한티 큰소리를 친다는 게 그렇게 떡 먹딧기 쉬운 노릇은 아니니." 

김제(전북)=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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