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여성들이 모든 남성을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잖아요"

조용호 / 기사승인 : 2021-09-24 19:2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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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깎이 작가 이경란 첫 소설집 '빨간 치마를 입은 아이'
고독하고 소외된 '소수'들이 겪는 삶의 고단한 풍경들
여성에 대한 사회와 남성들의 오래된 왜곡된 시각
대립보다 융합 위해 '세월의 필터'로 대처하는 지혜

'메르센'은 골치 아픈 노인네다. 아무도 같이 치려고 하지 않고 가르쳐주지도 않는데, 아파트 탁구 동호회에 나와 탁구대에 배를 붙이고 서서 감탄의 눈길로 구경한다. 공이 날아오거나 사람이 돌진해 와도 피하지 않고 굳건히 자리를 지킨다. 동호회 노인네들에겐 걸리적거리는 눈엣가시다. 메르센은 이들이 아무리 구박을 해도 아랑곳하지 않을뿐더러 회비를 내는 것도 거부한다. 30년 동안 수학 교사를 하다 은퇴하고 경비로 취직한 엄 씨는 이 노파 '끝순' 씨를  '메르센'이라고 불렀다.

 

프랑스 수학자 마랭 메르센(1588~1648)은 '메르센 소수'로 이름을 날린 사람. '메르센 소수'란 1과 자신으로밖에 나누어지지 않는 소수 중에서도 '2ⁿ-1'에 해당하는 극히 드문 메르센 수를 일컫는다. 이 소수는 컴퓨터가 등장한 이래 복잡한 계산을 통해 어렵게 하나씩 새로 발견되고 있는데, 가장 최근에는 2018년 51번째 메르센 소수가 발견됐다. 메르센 소수가 무한히 많이 존재하는지 아니면 그 개수가 정해져 있는지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복잡한 수학 상식을 말하자는 건 아니다. 이만큼 드문 이 숫자의 고독에 대해 말하는 중이다.

▲커리어우먼의 길을 걷다가 전업주부를 거쳐 늦깎이 소설가로 나선 이경란. 첫 소설집을 펴낸 그는 "이리저리 시달리고 나부끼다가 읽고 쓰는 사람이 되어 있는 내가 모처럼 마음에 든다"고 썼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소수가 아닌 합성수는 여러 다른 수들과 공약수를 공유하고 섞여 드는데 이 소수, 그중에서 더 특이한 메르센 소수는 오로지 1과 자신으로밖에 나누어지지 않는 사회적 부적응자인 셈이다. 엄 씨 또한 교사 생활 내내 자신을 '소수'라고 생각했거니와 탁구장에서 왕따 당하는 '철없는' 노인네를 두고는 '메르센'이라고 혼자 명명했다. 어떤 모진 말을 해도 듣는 둥 마는 둥인 이 메르센이 2박3일 탁구 동호회 소풍까지 따라오려고 하자 회원들은 작당을 하여 출발 날짜를 하루 늦게 가르쳐주고, 늦가을 비바람이 거센 날 탁구장 앞에서 오전 내내 기다리던 메르센은 폐렴에 걸려 드러눕는다. 엄 씨가 메르센을 두고 동료에게 중얼거리는 말.

 

'세상에 멸시해도 되는 수는 없는데… 숫자 하나하나가 다 다르다 이 말입니다. 합성수가 있으면 소수도 있는 거지요. 다른 숫자는 끝까지 다르지, 같아질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이경란의 첫 소설집 '빨간 치마를 입은 아이'(강)에 수록된 단편 '메르센'에 등장한 '소수'는 이번 소설집을 관통하는 키워드다. 밑바닥에서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는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라면과 홍차와 미자'에 나오는 여성 화자는 편의점에서 일하다 매일 새벽 외제차를 몰고 같은 시간에 나타나던 남자와 결혼하지만, 남편은 수상하게 사라지고 대신 비대한 살덩이를 끌고 거실에서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며 라면을 먹는 남편의 노모 '미자'를 보살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한편으로 이 여성은 최소한의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노인네를 만나 같이 식사를 해주는 아르바이트도 한다. 남편 때문에 맛을 느끼지 못하게 된 여자가 억지로 낯선 노인네를 위해 밥을 먹어주는 노역을 감수한다. 힘들게 일하고 집에 돌아오면 거대한 살덩이가 되어 출렁거리는 '미자'가 악다구니를 쓴다.

 

'여시 겉은 년, 또 누캉 붙어물라꼬. 내 아들 우쨌노! 누캉 붙어묵고 와서는 이 지랄이고! 나가라! 내 아들 어데다 빼돌리고 여어가 어데라꼬 와서 이 지랄이고!'

 

이 '미자'가 어디가 아픈지 라면조차 거부하고 침묵 속에 빠져든다. 여자는 이 노인네를 어찌할까. 이 '소수'들이 합성수 흉내라도 내게 될까. 답은 독자들이 확인할 몫이다. 이경란의 신춘문예(2018 문화일보) 등단작인 '오늘의 루프탑'에도 소수들은 등장한다. 코디네이터 어시스턴트로 일하는 젊은 여자 '수이'는 룸메이트가 보증금을 빼서 사라지자 루프탑으로 이사온다. 옆 건물 루프탑에 홀로 유폐되다시피 한 '할배'를 발견하고, 그 집에 드나들며 텔레비전을 보면서 고독한 노인을 돌본다. 소수가 소수를 배려하는 형국이다. 할배가 고마워서 구겨진 지폐뭉치를 수이 손에 힘겹게 쥐여주지만, 구역질을 하던 수이 손에서 떨어진 지폐는 마른 잎처럼 바람에 실려 가로수 너머로 날아간다.


이번 소설집의 표제작 '빨간 치마를 입은 아이'는 어린 시절부터 소수이던 여자 아이가 성인이 되어서도 그 굴레를 극복하지 못한 채 소멸돼가는 존재들을 바라보는 쓸쓸하고 정교한 단편이다. 재래시장에서 방치된 여자 아이가 공중변소에서 변소 지키는 사내에게 추행을 당한다. 여자아이가 커서 노인네 돌봄노동을 수행하다가 함께 쇠락한 시장통을 방문한 자리에서 그 시절 추행의 장본인이 자신이 돌보는 노인임을 알아보지만, 동반한 그 노인은 물론 당시의 모든 풍경은 이제 쇠락해서 곧 스러질 운명이다. 변소 아래의 더럽고 악취 나는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아동 성추행의 끔찍한 악행을 복합적으로 음각해내는 필력이 돋보인다. 애써 억누른 듯하지만 깊은 내부에서 분노가 연기처럼 매캐하게 밀고 올라오는 느낌이 강렬하다.

 

희망을 상실한 젊은 세대와 소멸돼가는 세대의 안타까운 접점을 그린 '연두'나, 타인들과 어울리는 방식을 냉철하면서도 흥미롭게 보여주는 '이모들의 집'에도 '소수'들은 존재한다. 요즘 젊은 남녀의 풍속을 그린 '페어웰, 스냅백'이나, 인문학이 무너진 시대의 블랙코미디 '요일 팬티 7종 세트'는 읽는 흥미를 돋우면서도 세태에 대해 새삼스럽게 성찰하게 만드는 다른 빛깔의 단편들이다. 

 

50대 초입에 늦깎이 소설가로 나선 이경란은 등단 3년 만에 소설집을 묶어냈고, 이번에 포함시키지 않은 단편만도 4편이 남아 있을뿐더러 장편도 이미 비축해놓았다. 이경란은 단편 하나를 많게는 40번까지 고쳤노라고 말했다. 그녀는 마감 직전까지 고치고 또 고친다고 했다. 밤에 읽고 수정한 뒤 아침이면 프린트해두었다가 다시 밤이 되면 고치고, 고친 다음에는 소리 내어 읽어보고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다시 고치는 패턴을 이어가고 있다. 

 

"쓰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안 쓰고 있으면 쓰고 싶고, 안 쓰고 시간이 지나가면 죄책감이 들어요. 작가가 됐는데 이렇게 안 쓰고 있으면 직무유기하는 거 아닌가 싶어요. 읽고 쓸 때가 제일 좋은 거 같아요. 쓸 때는 황홀한 고통을 느끼지만 그건 고통스러운 행복이구요, 읽을 때는 편안해집니다."

▲이경란은 "조금 들어가 살피면 누구나 패배자일 수 있다"면서 "하루에도 수십번 마주치는 그들이 바로 우리 곁에 있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이처럼 행복한 쓰고 읽는 삶을 어쩌다 진작에 시작하지 못했을까. 국어학을 공부하기 위해 국문과에 들어갔지만, 일찌감치 자신은 학문에 적성이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 졸업도 하기 전에 커리어우먼을 지향해 잡지사 기자의 길을 걸었다. 주로 여성지에서 화보 촬영을 도맡는 패션 담당으로 일하면서 프랑스 패션위크 고급기성복 패션쇼 프레타포르테까지 경험했다. 패션 담당 경험이 등단작 '오늘의 루프탑'의 코디네이터 '수이'에게도 투영됐다. 처음에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같은 발랄하고 세련된 칙릿(chick literature· 20,30대 미혼여성의 일과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장르)소설을 써보려고 했지만, 쓰다 보니 옥탑방에 유폐된 노인과 교감하는 쪽으로 인물들이 저절로 움직이는 경험을 했다. 소설집에 노인들이 자주 등장하거니와, 뇌경색으로 쓰러진 노모를 일요일마다 찾아가 목욕을 시켜드리는 일상이 반영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철야와 야근이 다반사여도 일은 재미있었는데 딸아이가 점점 학교에서 천덕꾸러기가 돼가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직장생활을 10년 만에 접고, 그 아이가 대학에 들어간 뒤 각성해 글쓰기로 나선 경우다. 목소리를 날카롭게 높이지는 않지만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부분 여성들의 억압된 현실과 왜곡된 세상의 시각을 직시하는 편이다. 단편들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관성에 찌들린 여성관을 지니고 있고, 대부분 폭력적이거나 무책임하고 비전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기도 한다. 50대 새내기 여성 작가 이경란이 바라보는 젊은 여성들의 젠더의식은 어떠할까.

 

"젊은 세대는 격앙돼 있고 예민해져서 대립의 칼날을 세우고 있지만 저는 나이가 있기 때문에 그처럼 예민한 데서는 이제 비켜나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세월이라는 필터를 하나 더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대립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은 융합이지요. 여성들이 모든 남성을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거든요. 서로 계속 미러링하면서 대립만 하고 있으니까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젊은 여성들만 목소리를 낸다고 해결되지 않고, 점차 바뀌어나가려면 모든 세대에서 그 세대에 맞는 이해를 해야 되지 않나 싶어요."

▲여성지에서 패션 담당 기자로 일했던 이경란의 경험은 등단작 '오늘의 루프탑'에 반영됐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말로 싸우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생활을 통해서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세대 간의 이해를 도모하고 왜곡된 생각을 바꾸어나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이경란은 말했다. 늦게 등단했으니 약관에 문단에 나온 작가들보다 쓸 시간이 촉박하다는 걱정에 이경란은 꾸준히 읽고 쓰는 긴장된 끈을 놓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등단 4년차 50대 중반 새내기 작가 이경란 소설의 나침반은 어디를 가리키고 있을까.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될 사람들이 누구이고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이런 생각을 해요. 사실 고통을 겪는 '창백한 사람들'은 따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조금만 들어가 살피면 누구나 다 패배자일 수 있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마주칠 수 있는 사람들이죠. 현실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인데 현실이 만만치 않은 사람들, 이들이 어떻게 살고 있고 우리는 이들과 어떻게 함께 살 것인지 쓰고 있고, 계속 쓰고 싶은 작품도 그런 겁니다."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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