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입수] '전두환 일지'에 '5·18 북한군 투입' 단 한 줄도 없어

김당 / 기사승인 : 2019-02-18 14: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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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일지》·《양지일지》 첫 공개…80년 보안사령관·중정부장 겸임 '5공前史'
보안사 2급군사기밀·중앙정보부 기구표와 간부명단, 조직개편 등 집권과정 담겨

여기에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두 권의 책자가 있다. 이 책자에는 저자와 발행일, 그리고 국제도서표준번호(ISBN)도 없다. 국립중앙도서관에 납본을 하지 않았으니 서지정보유통지원시스템에서도 검색이 되지 않는 '수제품'이다. 국군보안사령부가 펴낸 ≪호랑이日誌≫(79. 3. 5~80. 8. 21)와 국가안전기획부가 펴낸 ≪陽地日誌≫(80. 4. 14~80. 7. 18)가 그것이다. 

 

▲ '호랑이일지'에 실려 있는 국군 보안사령관 시절의 전두환 소장(왼쪽). '호랑이일지'와 '양지일지'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서리)을 겸임한 시절의 '지휘일지'를 보안사와 국가안전기획부가 각각 편찬한 '소장용 헌정' 책자여서 일반에 공개된 적이 없다.


두 책자는 부제의 연대기에서 알 수 있듯, 군인 전두환의 '지휘일지'를 묶은 것이다. 기자가 이 책자에 주목한 까닭은 두 일지의 연대기 중심에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역사를 관통한 5·18이 있기 때문이다. 즉, 최근 논란이 된 '5·18 북한군 투입설'을 당시 군정보기관과 국가정보기관을 틀어쥔 전두환 장군의 일지를 통해 검증하기 위해서다. 이 일지가 중요한 까닭은 전두환의 5·18 관련 기록은 5공화국을 거치면서 대부분 지워졌는데, 두 일지는 군을 떠나는 전두환에게 소장용으로 '헌정'한 책자이기 때문이다.

전두환의 '지휘일지'…보안사 군사기밀·중앙정보부 장악 집권과정 담겨


≪호랑이日誌≫(154쪽 분량)에는 전두환 장군이 지휘한 국군보안사의 부대편성표와 주요간부명단, 지휘방침, 부대 중요행사, 사령관 이·취임사, 단위부대장회의 지시문, 중앙정보부장 취임사, 전역사(轉役辭) 등이 실려 있다. 군정보기관인 보안사의 부대편성표와 주요간부명단은 군사2급비밀로 분류된다. 결과적으로 보안사가 자의적으로 책자에 군사기밀을 유출한 것이다.


5·18과 관련해 주목할 것은 '단위부대장회의 지시문'이다. 이는 '사령관 지시말씀'을 일선 단위부대장에게 전파하기 위해 문서로 만든 것이다. 전두환은 79년 3월 5일 보안사령관 취임 이후 4회(79년 4월 26일과 7월 19일, 80년 1월 24일과 3월 27일)에 걸쳐 단위부대장회의 지시문을 하달했다. 


그런데 전두환이 80년 4월 14일부터 중앙정보부장을 겸임한 뒤로는 단위부대 지시문이 없다. 자신의 수족들이나 다름없는 보안사는 참모장(남웅종 준장)과 비서실장(허화평 대령)에게 일임하고 중앙정보부장과 국보위 상임위원장 직무에 전념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예하 단위부대 지시문에 당시 전두환이 '12·12 사건 관련 악성 유언비어에 유감'을 표하며 사건의 배경과 경위를 직접 밝힌 적이 있지만 5·18을 직접 언급한 적은 없다.


≪陽地日誌≫(106쪽 분량)는 △부(部) 편성표 △주요간부 명단 △주요 행사 △지시각서 △특이사항 △연설문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제의 연대기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기록이 전두환 부장서리(1980. 4. 14~1980. 7. 17)의 동정과 말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특히 연설문에는 전두환 부장과 신군부(보안사)가 10.26 이후 중앙정보부를 점령(접수)한 뒤에 집권을 위한 한 축으로 이용해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陽地日誌≫는 국가정보기관(중정)을 접수한 군정보기관(보안사)의 '학살 기록'이자, '안기부판 5공前史'라고 부를 만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정보기관을 접수한 신군부가 보안사의 무력과 중앙정보부의 정보력을 바탕으로 어떻게 집권 시나리오를 전개했는지 보여주는 '승자의 기록'이기도 하다.

'광주사태' 터지자 모든 정보력 광주에 집중해 출장 선무공작
 

하지만 집권가도에 '광주사태'(5. 18~27)라는 빨간불이 터지자 집권 야욕을 채워가던 신군부는 계획에 차질을 빚을까 봐 모든 정보력을 광주에 집중시켰다. 신군부의 중앙정보부 개편 작업도 중단되고 모든 정보수집-선무공작 활동이 광주에 집중되었다. 국내 파트 근무자의 상당수가 서울에서 광주분실로 출장선무공작을 내려갔다. 당시 보안사는 홍성률 대령(1군단 보안부대장) 외에도 최예섭 보안사 기조실장과 최경조 대령을 광주에 급파해 민간인으로 위장한 군인 300명으로 꾸린 선무단을 운용했다. 


당시 홍성률 대령은 경찰과 광주 505보안대의 지원을 받아 3개조의 정보조를 통합-지휘했는데 보안사 상황보고에는 "(5월 23일) 18:30 시내에 잠복하여 특수임무를 수행중인 당부대 홍성률 대령의 보고에 의하면, 극렬폭도들의 약탈과 강제동원 등으로…(중략)"라고 적혀 있다. 이후 홍 대령은 6월초에 보안사령관에게 5.18종합보고를 했다. 


이에 따라 중앙정보부와 보안사의 출장공작-선무단이 광주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규명할 필요가 있다. 또한 신군부가 5.18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의 선동에 의한 폭동'으로 낙인찍는 과정에서 보안사가 수행한 특수임무가 무엇인지 규명되어야 한다. 


광주항쟁이 유혈 진압되고 대대적 기구 개편을 단행한 직후인 6월 10일 재경부서 과장급 이상 및 대공분실장 등 177명과 포상자 65명이 참석한 가운데 본청 강당에서 부 창설 19주년 기념식이 개최되었다. 전두환은 이날 기념사에서 처음으로 '광주사태'를 언급하면서 '북한의 계급투쟁에 동조한 국가전복 경향을 띠고 있다'는 식으로 왜곡했다.

 

▲ '양지일지'(80. 4. 14~80. 7. 18)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10.26 사건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왼쪽 위)이 중앙정보부장(서리)에 취임(그 아래)한 이후 석 달 동안 중앙정보부를 지휘한 전두환을 위해 국가안전기획부가 편찬한 '개인 소장용 헌정 책자'이다.


"현실 정치문제를 내세워 공공연히 정부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온 학생들의 시위, 그리고 일부 난동자의 폭력에 휘말렸던 광주사태는 일찍이 없었던 민족적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위험스러운 것은 이번 학생시위와 광주사태를 계기로 북한괴뢰의 계급투쟁 의식에 공공연히 동조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국가를 전복하겠다는 경향이다. 따라서 지금의 상황은 정부나 정권의 차원이 아니라 국가 차원의 생존여부가 걸린 국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양지일지》, 95쪽)

광주에선 형사범죄 줄고 무장간첩 침투도 전무


계엄은 본디 전시의 초비상체제다. '일부 계엄'일 때는 계엄사무가 '대통령→국방부장관→계엄사령관'의 지휘계통으로 추진된다. 그러나 '전국 계엄'일 때는 '대통령→계엄사령관'으로 지휘계통이 단순화되어 계엄사령관이 국무회의를 통하지 않고서 3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런데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은 어떤 경우든 계엄 하에서는 계엄사령관의 지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를 피하기 위해 만든 초헌법적 최고권력기구가 '국보위'인 것이다.


국보위 설치령(의안번호 386호)이 국무회의에서 가결된 것은 '광주사태'가 진압된 5월 27일이었다. 그러나 안건 자체가 대외비였고 국무위원들에게는 함구령이 내려졌다. 신군부가 국무회의 의결이 되었는데도 국보위를 세상에 공개하지 않은 것은 '광주사태' 뒷수습 때문이었다. 그래서 신군부는 5월 31일 계엄사가 '광주사태 전말'을 발표함과 동시에 '국보위'를 공개토록 했다. 


1980년 7월 18일 본청 강당에서 열린 전두환 부장서리의 이임식에는 과장급 이상 및 대공분실장 177명은 물론, 외무장관(박동진), 내무장관(김종환), 국방장관(주영복) 등 주요 부처 장관들과 계엄사령관(이희성), 육사11기 동기생인 국보위 운영분과위원장(이기백), 역시 육사 동기이자 국보위원인 수경사령관(노태우), 특전사령관(정호용) 등 군부의 실세들이 총출동했다. 청와대 출입기자 29명도 초청을 받아 참석했다. 아직 최규하 대통령의 임기(1979. 12~1980. 8) 중이었지만, 이미 권력의 추는 한쪽으로 기운 뒤였다. 


전두환은 이임사에서 다시 한번 광주사태 및 김대중 사건으로 인한 사회 혼란, 그리고 북한 무장간첩 침투 도발과 이에 따른 '국보위'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안으로는 10.26사태 이후 잇달아 일어난 사북사태, 학생시위, 광주사태, 그리고 김대중 사건 등 정치·경제·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혼란과 불안이 계속되고 있다. 한편, 이러한 내외정세에 편승하여 북괴는 대남 선전공세의 강화와 잇따른 무장간첩의 침투 등 갖가지 도발을 격화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국가비상시국에 처해 국가를 보위하고 국민의 생존권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도저히 평상체제로는 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발족하게 되었으며…(생략)" (≪陽地日誌≫ 104-105쪽)


전두환은 그해 8월 서둘러 대장계급을 달고 예편하고 보름만인 8월 27일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중앙정보부 부장(서리) 출신의 첫 대통령이었다. '승자의 기록'은 여기서 끝난다. 


하지만 '난동자의 폭력에 휘말렸던 광주사태'라는 승자의 기록과 달리 광주민주화운동 10일 동안 광주에선 형사범죄가 오히려 평소보다 줄었다. 그 기간에 북한의 무장간첩 침투도 전무했음이 국정원과거사위의 공식 기록으로 입증되었다. 광주사태의 혼란과 북괴의 무장간첩 침투도발이라는 비상시국 때문에 국보위를 발족했다는 전두환의 주장도 새빨간 거짓말로 드러났다. 심지어 새빨간 거짓말로 가득 찬 그 승자의 기록도 광주사태와 김대중 그리고 북한 무장간첩 침투를 연결해 나열하면서도 '5·18 북한군 투입설'은 단 한 줄도 없다. 

 

전두환 자신이 보안사와 중앙정보부의 모든 정보력을 광주에 집중해 출장 선무공작을 벌인 결과가 그렇다.

 

UPI뉴스 / 김당 기자 dangk@upinews.kr 

 

※곧 이어 《호랑이일지와 《양지일지》를 토대로 '안기부판 5공 前史'를 해부한 '김당의 시크릿파일' 연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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