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당의 시크릿파일] ①'박정희교 신도' 이후락과 反김대중 정치공작

김당 / 기사승인 : 2019-03-14 08:00:40
  • -
  • +
  • 인쇄
최초 공개 <陽地日誌(양지일지)>에 담긴 '승자'의 기록-정보부에서 안기부로
이후락 "우리는 박정희교 신도로서 공산주의와 모든 잡스런 요소 제거에 앞장서야"

▲ <호랑이일지>에 실려 있는 국군 보안사령관 시절의 전두환 소장 사진(왼쪽). <호랑이일지>와 <양지일지>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서리)을 겸임한 시절의 '지휘일지'를 보안사와 국가안전기획부가 각각 편찬해 '소장용으로 헌정'한 책자여서 일반에 공개된 적이 없다.


[연재를 시작하며] 여명기(黎明期)의 사전적 의미는 '동이 틀 무렵', 또는 '새로운 시대나 새로운 문화 운동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1980년 '서울의 봄'은 구체제(유신체제)의 갑작스런 붕괴와 함께 왔다. 정치권에서 '서울의 봄'은, 구체제는 붕괴되었지만 신체제는 아직 들어서지 않은 '안개정국'으로 통했다.

육군 소장 전두환은 1979년 3월 5일 국군보안사령관에 취임해 이듬해 '서울의 봄'과 안개정국 속에서 8월 21일까지 재직했다. 보안사령관으로 재직한 기간에 전두환은 대통령을 시해한 '역적(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무리'를 체포해 사형시키고, 자신의 유력한 정적들인 '3김'씨(김대중·김영삼·김종필)를 제거하고 마침내 권력을 손에 쥐었다. 


△10·26 박정희 시해 △12·12 군사반란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5·18 광주민주화운동(당시는 광주사태) △5·30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설치 △7·30 교육 개혁(과외금지) 조치 △8·14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첫 재판) △8·16 최규하 대통령 하야 △8·21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서 국가원수로 전두환 추대 같은 현대사의 굴곡진 사건들이 모두 보안사령관 재임중에 발생했다.

또한 전두환은 1년 5개월 남짓한 이 기간에 육군 중장으로 승진했으며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10·26 사건 수사) △중앙정보부장서리(80. 4. 14~80. 7. 18) △국보위 상임위원장(80. 5. 30~80. 8)이라는 핵심 요직을 겸임했다. 국보위는 10·26 사건으로 유신체제가 붕괴된 이후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신군부가 내각을 장악하기 위해 만든 임시행정기관이다.

'안개정국'이 걷히자 전두환 중장은 보안사(군), 중앙정보부(정보), 국보위(내각)까지 장악한 권력 최고 실세로 떠올랐다. 그리고 전군 주요지휘관회의에서 국가원수로 추대한 다음날인 8월 22일 육군 대장으로 승진 전역했다. 이어 잘 짜인 각본에 따라 닷새 뒤인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9월 1일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민주화 이후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의 반헌법 행위에 대한 단죄와 과거사위원회의 진상 규명이 이뤄졌다. 하지만 5·18 당시 무장헬기 기총소사 논란에서 보듯 아직도 어둠에 가려진 실체적 진실들이 적지 않다. 특히 전두환 장군이 보안사령관과 국보위 상임위원장 직함으로 수행한 공개적 역할과 달리, 중앙정보부장(서리)으로 수행한 역할은 대부분이 현대사에서 베일에 가려져 있다. 서슬 퍼런 비상계엄 상황에서 보안과 비밀을 앞세운 정보기관의 영역을 취재할 기자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중앙정보부(1961~1980년)와 국가안전기획부(1981~1998년)를 거쳐 국가정보원(1999~현재)에 이르는 한국 국가정보기관의 역사는 김충식이 쓴 <남산의 부장들>(폴리티쿠스, 2012년 개정증보판)과 필자의 졸저인 <시크릿파일 국정원>(메디치, 2016년)과 <시크릿파일 반역의 국정원>(메디치, 2017년) 등 3권의 책에 대부분 담겨 있다
(오랫동안 ‘남산’은 중앙정보부의 별칭으로 통했다). 하지만 세 권에 빠져 있는 대목이 바로 '안개정국' 하에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서리가 수행한 역할과 활동상이다. 


그런데 앞서 보도한 "[단독입수] <호랑이일지>·<양지일지> 첫 공개…80년 보안사령관·중정부장 겸임 '5공前史'"(2. 18)에서 예고한 대로, 필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서리)을 겸임한 시절의 '지휘일지'를 보안사와 국가안전기획부가 편찬해 '소장용으로 헌정'한 두 책자를 입수했다. 이에 일반에 공개된 적이 없는 <호랑이일지>와 <양지일지>를 토대로 '안기부판 5공 前史'를 해부한 '김당의 시크릿파일'을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를 통해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를 잇는 '여명기 남산의 흑역사'가 복원되어 그 실체가 드러나기를 기대해 본다.

"박정희교의 신도" 이후락의 등장과 정치공작의 시작


▲ 1952년 10월 백선엽 육군참모총장(오른쪽에서 두번째)이 김창룡(맨 오른쪽), 이후락(왼쪽에서 두번째) 등 정보국 요원들과 찍은 사진이다. 나중에 김창룡이 특무대장이 되고, 이후락은 중앙정보부장이 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육군 정보국은 한국 정보·보안체계의 인력풀을 제공했다. [백선엽 회고록]

1970년 12월 22일 주일(駐日) 대사 이후락이 제6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했다. 이듬해 4월로 예정된 제7대 대통령선거를 불과 4개월 앞두고서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에 앞서 1년 전에 3선의 걸림돌인 헌법을 개정(1969년 6차 개헌)해 법적인 근거를 확보해 놓은 터였다. 당시 상황은 이종찬 전 국정원장의 자서전 <숲은 고요하지 않다 1>(한울, 2015년)에 잘 묘사돼 있다. 


이종찬(육사 16기)은 1965년 육군 대위 때 중앙정보부 중앙정보학교 공채 정규과정 1기로 입교해 중정 근무중에 소령으로 진급해 1971년 예편과 동시에 정보서기관으로 임용되었다. 그후 주영(駐英) 대사관 참사관과 부이사관, 이사관을 거쳐 1980년 관리관으로 승진해 중앙정보부 기조실장으로서 국가안전기획부로 개편 및 숙정 작업을 주도했다. 그해 정계에 입문한 이종찬은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 출범후 마지막 국가안전기획부장이자 초대 국가정보원장으로 18년만에 친정에 복귀해 다시 한번 조직 개편의 '악역'을 수행했다


1970년 당시 중정의 육군 소령 이종찬은 이후락 부장의 취임사를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 부는 대통령 직속기관으로서 최고 통치자 박정희 대통령이 국정을 펴나감에 있어 공산주의는 물론 모든 잡스러운 요소를 제거하는 데 최우선적인 임무가 있다. 나는 여러분에게 법 또는 그 이상의 신분을 보장하겠으며, 그 대신 여러분은 조직의 일원으로서, 즉 세포의 하나로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박정희교의 신도로서, 또 전도사로서 앞장서야 할 것이다." (이종찬, 숲은 고요하지 않다 1, 249쪽, 굵은 글씨는 필자 강조)


국가정보기관의 수장이 부원들에게 공공연하게 '정권안보가 곧 국가안보'임을 천명한 것이다. '법 또는 그 이상의 신분을 보장'해줄 테니 '박정희교의 신도이자 전도사'로서 '모든 잡스러운 요소를 제거하는 최우선적인 임무'를 수행하라는 지시였다.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 출신의 정보통인 신임 부장은 정보부 조직도 선거체제로 개편했다. 부장 밑에 차장 한 명과 차장보 세 명을 두고, 각각 '국가 안보'를 맡은 이철희 정보차장보(해외-대북 담당)와 '정권 안보'를 맡은 강창성 보안차장보(국내보안 담당), 그리고 부 운영을 맡은 이상열 운영차장보(운영·지원 담당)로 편제했다. 


강창성(육사8기)은 1964년 중앙정보학교장으로 부임해 정보부 요원 양성계획을 안착시키고 기조실장으로 개혁작업을 주도했다. 이후 소장 승진과 함께 군에 복귀해 5사단장과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차장을 역임한 뒤에 다시 정보부 보안차장보로 기용되었다. 당시 이종찬 소령은 강창성 차장보의 보좌관(경제담당)이었다. 강창성이 71년 9월 보안사령관으로 영전한 뒤에는 김동근 보안수사국장이 보안차장보로 승진 기용되었다.


이에 따라 '정권 안보'를 맡은 강창성 차장보 밑에는 정치를 총괄하는 국내정보국(전재구)과 정치 사건을 총괄하는 보안수사국(김동근)이 배치되고, 이상열 차장보 밑에는 총무국과 감찰실, 그리고 정보학교가 배치되었다. 강창성의 당면 목표는 김대중 후보를 포함해 야당을 무력화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국내정보국은 '풍년사업'이라는 공작을 수행하기 위해 전재구 국장과 김성락 부국장, 그리고 김영광 판단조정과장은 관련 정보보고서와 공작보고서에 파묻혀 지냈다.

이후락, 정보부의 궁정동·삼청동 안가에서 선거대책 조정
 

이후락은 정부여당의 최고위급 인사들이 선거대책을 수립·조정하는 중앙대책위원회에서 논의된 사항들을 종합해 대책을 마련토록 했다. 중앙정보부의 궁정동 안가와 삼청동 안가가 사실상의 선거대책본부였다. '중대위'에는 당시 정부에선 백두진 국무총리, 이후락 정보부장, 박영원 내무장관, 김정렴 비서실장, 신직수 검찰총장 등이, 공화당에선 백남억 당의장, 길재호 사무총장, 김진만 원내총무, 김성곤 재정위원장 등이 참여했다. 의장은 총리와 당의장이 교대로 맡고, 간사는 정보부장이 맡았는데 강창성 차장보는 부장을 따라 배석했다. 

 

▲ 왼쪽부터 강창성 보안사령관, 김형욱·이후락·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박정희 대통령, 윤필용 수경사령관, 박종규·차지철 경호실장,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영화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 포스터에서 패러디했다). 

모든 정보와 대책은 김대중에게 맞춰졌다. 한 마디로 반헌법 행위를 서슴지 않는 '나쁜X들의 전성시대'였다. 1970년 12월 27일 궁정동 안가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김대중의 자금을 철저히 봉쇄한다. 현재 약 3억원이 확보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김대중이 지방 유세에서 매일 국민의 귀에 솔깃한 공약을 터뜨리고 정치 쇼를 계속하고 있는데, 이를 분쇄할 준비를 해야 한다.
 유진산 당수와 갈라져 이번 대선에 소극적인 이재형씨와 그 계보를 탈당시켜 가창 국민당에 합치도록 한다.
 예비역 장군의 회유 대책을 강구한다. 특히 혁명 주체 유원식 장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이에 관한 대책을 공화당이 맡아 추진한다.
 김대중을 대통령 선거에 패배케 한 뒤 국회의원 후보 등록까지 저지할 수 있는 방책을 사전에 강구한다.
 <대중반정>이라는 책자에 "김일성 정권을 방불케 하는 독재 정권" 운운한 대목이 있는데, 이를 국가보안법으로 묶을 수 있는 법적 대책을 마련한다. (이종찬, 253-254쪽)


중앙대책위원회 아래에는 차관급 실무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실무대책회의 멤버는 김상복 청와대 정무수석, 박영수 내무차관, 홍경모 문공부차관, 이봉성 대검차장, 서인석 국무총리 비서실장, 문창탁 공화당 사무차장, 강창성 보안차장보, 전재구 국내정보국장 등이었다. 이종찬 보좌관은 강창성 차장보를 수행해 실무대책위원회에 배석했다. 예를 들어 실무대책회의에선 김대중 후보 집 폭발물 사건도 논의되었다. 


1971년 1월 27일 당시 대통령 선거(4. 27)를 석 달 앞두고 김대중 후보집 폭발물 사건이 발생하자 김대중 측과 중정은 서로 '정보기관의 테러' 대 '김대중측 자작극' 논란을 벌였다. 결국 미제사건으로 끝났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조사받은 김대중 진영의 조직원은 51명에 달했고, 특히 엄창록은 본인뿐 아니라 부인과 가정부까지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김충식은 엄창록에 대한 본격 회유가 시작된 것은 이때부터였고, 이후락은 6국장 김성주팀에 김대중과 엄을 격리시키라는 특명을 내렸다고 기록했다(김충식, 273쪽)


그런데 실무대책회의에서는 용의자가 지목되었으나 "범인을 빨리 잡으면 선거는 하나 마나"라는 의견에 따라, 국정조사단을 구성하되 여 4인, 야 3인의 비율로 구성해 활동기한은 최대한 짧게 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심지어 선거 날짜도 중앙정보부가 복술가에게 물어 박정희에게는 길일(吉日)이고 김대중에게는 절명일(絶命日)이라는 4월 27일로 골랐다. 이종찬은 당시 상황을 일기에 이렇게 기록했다.


1. 여당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김대중의 조직참모 엄창록을 회유해 우선 200만원으로 병 치료와 요양을 구실로 속리산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엄창록의 명단에 따라 사조직을 완전히 밝혀냈다. 엄창록은 그 대가로 2,000만원을 받았고 선거후 생계도 책임지도록 했다. 엄창록을 회유하는 데 이후락 부장이 직접 만났다는 설도 있지만 확인되지 않았고, 현재 6국 공작과의 임모 과장과 직원 두 명이 전담해 행동을 같이 하고 있다.
2. 신민당 부녀국장 박(朴)모는 200만원을 받고 탈당했으며 신문에 대문짝만한 광고를 게재했다. 그녀는 탈당하기 직전 당 사무국 회의에 참석했고, 그후 바로 배신한 것이다. 그 외에도 쓰레기 같은 인물들이 많다.

3. 경남의 지구당 위원장 이(李)모는 돈 100만원에 서약서를 쓰고 대통령선거에서 박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서했다. (이종찬, 256쪽)


김대중의 조직참모 엄창록은 신출귀몰에 가까운 조직선전 전술로 집권당의 관권·금권선거를 격파한 전설적인 인물로 꼽힌다. 선거·정치공작의 본산인 중정조차도 그의 조직선전 전술을 정리해 책으로 엮어 공화당과 청와대에 은밀히 납본할 정도였다(김충식, 남산의 부장들(33) '선거귀재' 엄창록 회유공작, 동아일보, 1991. 3. 29).


이처럼 상대후보 진영 인사의 매수공작 등 모든 선거 사무의 배후에서 중앙정보부가 힘을 발휘했다. 야당 공약의 '김 빼기'도 중정의 몫이었다. 중정은 신민당이 공약을 발표하기 전에 내용을 입수해 이를 정부 각 부처에 보내 '그 이상의 정책'을 만들어 국무회의에 올리게 했다. 제3의 후보를 내세우거나 지원해 야당표를 분산시키는 것도 1963년 선거 때부터 해온 수법이었다. 약 50만표의 인원을 선정해 20억원(1표당 4000원꼴)에 사는 매표공작도 'TT공작'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었다. 


선거·정치공작뿐만 아니라 이른바 북풍 공작의 원조도 이후락의 중정이었다. 김대중의 기세가 한창 오르고 있을 때 북한의 허담 외상이 평화통일론을 제의했다. 김대중 후보의 4대국 전쟁 억지 보장안과 남북교류론, 향토예비군 폐지 등을 선의로 받아들이겠다는 조건 아래 미군 철수, 남북 협상 등 8개항을 제시했다. 통상 북한측 제의는 보안을 유지했지만 대책회의는 이를 즉각 공개한 뒤에 김대중에 대한 전면적 공세를 펴기로 결정했다. "북한에서 피리를 불면 김대중은 춤을 춘다"는 흑색선전이 전개되었다. 중정의 흑색선전과 언론의 확대 재생산은 국민의 안보 위기의식을 자극했다.


4월 22일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마지막 유세에서 박정희는 "이번으로 여러분께 표 달라는 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호소했다. 그리고 닷새 뒤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는 94만표 차이로 간신히 김대중을 따돌렸다. 서울에서 김대중은 119만8018표(59.4%)을 얻은 반면, 박정희는 80만5722표(40.0%)에 불과했다. 

 

민심은 박정희를 떠나 있었다. 김대중이 "이번 선거에서 공화당이 승리하면 앞으로 총통제가 채택되어 다시는 대선이 없을 것"이라고 예고한 대로, 박정희는 이듬해 10월유신을 단행해 사실상 총통제를 채택했다. 박정희가 마지막 유세에서 호소한 대로 실제로 '국민에게 표 달라는 것은 마지막'이 되었다.

 

((다음에는 ②궁정동 안가 B동에서 진행한 유신의 코드명 '새마을재건계획' 편이 이어집니다))

 

UPI뉴스 / 김당 기자 dangk@upinews.kr

[저작권자ⓒ UPI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 글자크기
  • +
  • -
  • 인쇄

핫이슈

2021. 1. 19. 0시 기준
73115
1283
594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