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당의 시크릿파일] ③전두환, 남산 갈 때마다 기관단총 무장경호 대통령 행세

김당 / 기사승인 : 2019-04-01 13:5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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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끼 호랑이' 전두환의 등장과 보안사의 중앙정보부 접수
80년 6월 중앙정보부 최초의 대량 해직…안기부 공식기록과는 차이

박정희는 윤필용 사건(1973. 4)과 김대중 납치 사건(1973. 8) 등의 책임을 물어 1973년 12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전격 경질하고 그 자리에 신직수 검찰총장을 앉혔다. 광화문 정부청사에 집무실을 두고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종신집권 플랜(10월유신)을 추진하는 데 앞장선 정보·공작정치의 달인을 제거하고 법률가를 내세운 것이다. 


신임 7대 신직수 부장(1973. 12~1976. 12)은 박정희가 5사단장을 할 때 법무참모(소령)였다. 그런데 박정희는 신직수를 부장으로 기용하면서 당시 보안사령관 출신의 유정회 의원이던 김재규를 정보부 차장으로 발령냈다. 김재규가 5사단 참모장일 때 신직수는 법무참모였다. 그로서는 군 시절 부하를 상전으로 모셔야 하니 모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김재규는 이때부터 박정희의 용인술에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김재규의 차장 임기(1973. 12~1974. 9)는 그리 길지 않았다. 윤필용 사건으로 코너에 몰린 이후락은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만회해 보려고 했으나 오히려 이듬해 재일교포 문세광의 박정희 암살 미수 및 육영수 피살(1974. 8. 15) 사건이라는 후과(後果)를 초래했다.

차지철 아래서 힘을 키운 '새끼 호랑이' 전두환


▲ 전두환 준장이 1973년 제1공수 여단장 시절 부인 이순자 씨와 함께 행사를 참관하고 있다. 전두환과 차지철은 공수부대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전우애를 맺었다. [국가기록원]


충격적인 피습 사건을 계기로 박정희는 1974년 9월 18일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비롯해 재무·법무·문교·문공·교통·체신·건설·통일원의 9개 부처 장관을 경질했다. 19개 부처 중 절반에 해당하는 대폭적인 개각이었다. 이때 김재규 중정 차장은 건설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박정희의 총기가 흐려진 것일까? 더 잘못된 인사는 문세광 사건으로 문책한 박종규 경호실장 후임으로 차지철을 임명한 것이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10·26 사건의 직접적 원인 제공자이기에 앞서, 1976년 3월 제1공수여단장을 마친 전두환 준장을 발탁해 경호실 작전차장보에 임명한 장본인이었다. 이후 전두환은 차지철의 비호 아래 1977년 소장으로 진급해 1978년 1월 제1사단장에 부임한다. 


전두환과 차지철의 인연은 195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차지철은 간부 후보생 과정을 거쳐 1953년 소위로 임관했고, 전두환은 4년제 육사를 졸업해 1955년 소위로 임관했다. 전두환은 1958년 새로 창설하는 공수단에 지원해 이때 차지철 대위와 만나 인연을 맺게 된다. 


이후 두 사람은 1960년 미국 육군보병학교 특수전 교육에 차출되어 '죽음의 지옥훈련'으로 알려진 특수전 교육(레인저 코스)을 함께 하면서 생사고락의 전우애를 다지게 된다. 이처럼 공수단에서 끈끈한 인연을 쌓은 두 사람은 1961년 5·16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함께 근무하게 된다. 이런 끈끈한 인연이 있었기에 차지철이 전두환을 경호실 작전차장보로 발탁한 것이다.


당시 차지철 경호실장 시절에 장관들까지 동원한 국기 하강식 일화는 유명하다. 차지철 밑에서 '정치군인의 길'을 학습한 전두환은 1사단장으로 나갔다가 1년2개월 만인 1979년 3월 국군보안사령관으로 발탁된다.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에 보직된 것은 노재현 당시 국방부 장관의 천거도 있었지만 '차지철의 영향력'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김충립 前 수경사 보안반장 육필수기, 신동아 2016년 6월호). 


이런 가운데 '새끼 호랑이'(호랑이는 보안사의 상징 동물임) 전두환은 차지철의 비호 아래 힘을 키우면서 김재규 부장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중심으로 한 권력의 음모와 암투의 공간에 진입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8대 부장 김재규(1976. 12~1979. 10)는 1979년 10월 26일 운명의 날에 박정희와 차지철을 총으로 쏴 죽였다.  

 

▲ 박정희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 1979년 10월 27일자 기사.

중정 간부들 줄줄이 보안사 '빙고호텔'로 연행


박정희의 비호 아래 무소불위의 힘을 누린 중앙정보부는 하루아침에 국가원수를 시해한 '역적의 소굴'로 전락했다. 김재규는 10월 27일 0시 20분께 김진기 헌병감과 보안사 오일랑 중령에 의해 체포되었고, 중정 또한 보안사의 엄격한 통제 속으로 들어갔다. 


정승화 계엄사령관은 선임차장인 윤일균 1차장에게 부장직무대행을 맡겼다. 국장급 이상은 전원이 국가원수를 시해한 반역에 협조한 혐의로 줄줄이 보안사의 악명 높은 '빙고호텔'(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가서 조사를 받았다. 당시 이종찬은 김재규 부장의 신임을 받았음에도 부서장이 아닌 부국장 직급이어서 빙고호텔 조사를 면했다. 


중앙정보부 부서장들이 겪은 수모와 치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접대하라는 김재규 부장의 지시로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연회장 별관에 있었던 김정섭 제2차장보가 10월 27일 아침 가장 먼저 육군본부 범죄수사단장 우경윤 대령에 의해 연행되었다. 


곧 이어 보안사로부터 중정의 모든 부서장(실국장)은 육본 B2벙커에서 열리는 정승화 계엄사령관 주재 회의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다. 중정 부서장 20여명이 삼각지 육본 B2벙커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기다린 것은 701부대장(육군본부 보안부대장) 변규수 준장(1978. 2~1980. 6)이었다. 변 장군은 군대식으로 명령했다(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폴리티쿠스, 2012년, 746쪽).


"경칭은 생략합니다. 부서장급은 호명에 따라 한 명씩 출입문으로 나갑니다."


문밖을 나서자마자 건강한 보안대 수사관들이 이들을 낚아채 '빙고호텔'로 데려갔다. 중정 부서장들은 하루아침에 범죄인 취급을 받는 날벼락을 맞았다. 기세 등등했던 중정 실국장들은 빙고호텔의 관례대로 허리띠 없는 군복으로 갈아입은 뒤에 '매타작'을 당했다. 다행히 초동수사에서 김재규 단독범행으로 결론이 남에 따라 실국장들은 전원 사표를 쓰고 사나흘 만에 풀려나 광화문 국제호텔 앞 치안본부 특수대로 넘겨져 추가 조사를 받았다.

전두환 합수본부장 "정보부 부서장들은 다 잡아넣어야 마땅"


▲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의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는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979년 10·26 사건으로 계엄사 합수본부장을 맡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을 수사했다. [국가기록원]


중정 간부들은 11월 3일께 차에 태워져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보안사)로 갔다. 전두환 합수본부장(보안사령관)은 근엄하게 말했다.  


"국가원수 시해 사건의 책임을 물어 정보부 부서장들은 다 잡아넣어야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그동안 국가안보에 기여한 공로 등을 참작해서 일단 원대 복귀토록 했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이문동 본청사(해외파트)와 남산의 분청사(국내파트)로 나뉘어서 근무했다. 남산 분청사 현관 앞에 도열한 부국장, 과장들이 1주일만에 돌아온 부서장들을 맞이했다. 이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통곡했다(김충식, 755~756쪽).


육군본부 B2벙커에서 이들을 맞이했던 변규수 장군과 최예섭 대령(보안사 5처장), 최경조 중령, 김두종 문관 등 보안사 처장·과장급 장교들이 '중앙정보부 점령팀'(감독관)을 맡아 실무를 장악했다. 이어 10월 30일 계엄사 부사령관인 이희성 육군 참모차장(육사8기)이 제9대 중앙정보부장(서리)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가 재임한 기간은 12·12군사반란 때까지 한달 남짓이었다. 전두환 합수본부장(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12·12 당시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구속하자, 이희성 대장은 참모총장과 계엄사령관을 겸직하게 되어 중정을 떠나고 윤일균 1차장이 다시 부장직무대행이 되었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이듬해 3월 14일 오후 이문동 중앙정보부 청사에서 최근의 북한 동향에 대해 브리핑을 받고 윤일균 부장직무대행과 환담을 했다. 윤 직무대행은 10·26 사태 이후 정보부 운영 실태에 관한 질문에 "그동안 정보부가 너무 많은 분야에서 활동해 부작용을 낳았음을 깊이 반성하고 새로운 자세로 임하기로 했다"고 바싹 자세를 낮추었다. 그는 이어 작년 12·12사태로 부장 직무대리를 맡아 해온 근무지침을 얘기하면서 "'우리 요원들은 귀도 막고 입도 막은 채 묵묵히 소임만 완수해 나가자'고 간부들에게 말한 바 있다"고 강조했다(김충식, 777~779쪽). 대통령의 촉수(觸手)인 정보부가 입을 막는 것은 이해가 되었지만, 귀를 막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복지부동'이었다.


하지만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은 '복지부동의 정보부'를 개혁해 보안사와 함께 집권을 위한 두 축으로 사용하려 했다. 실제로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중앙정보부장서리를 겸하기 전부터 중앙정보부 개혁을 추진했다. 당시 이종찬 부국장은 전두환의 요구로 보안사의 권정달 2처장(정보처장), 허화평 비서실장, 허삼수 6처장(인사처장)과 김용갑 대령 등 육사 17기생이 주축인 신군부 세력과 만나 논의해 만든 중앙정보부 개혁안을 전달했다. 


신군부는 당시 전두환 사령관이 부장으로 부임하면 곧 대대적인 조직 개편과 인사 쇄신을 할 예정이기 때문에 중앙정보부 숙정 명단을 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신군부는 이 작업을 위해 이종찬 부국장을 총무국장으로 임명하고, 중정 수송과장으로 재직중에 국방대학원 교육과정에 있던 김용갑 대령을 감찰실 부실장으로 기용했다(이종찬, 앞의책, 349쪽).

전두환, 1980년 4월 15일 중앙정보부장서리 취임


▲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중앙정보부장서리 임명장을 받고 있다. [국가기록원]


전두환 장군은 1980년 4월 15일 중앙정보부장서리로 취임했다. 전두환은 군권에 이어 정보권까지 장악했지만, 내심으로는 불안했다. '주군을 시해한 역적'인 김재규의 잔당이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했다. 실제로 당시 전두환 부장이 남산 분청사에 도착하면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경호원들이 먼저 차에서 내려 사주경계를 할 정도로 공포 분위기를 연출하며 '점령군' 행세를 했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 경호원들이 시장에서 기관단총을 노출해 '과잉경호' 논란이 벌어졌지만, 전두환은 이때부터 대통령급 경호를 한 셈이다. 


또한 보안사의 '중정 점령팀'은 만에 하나 10·26사건에 연관된 김재규 추종세력이 남아 있을 경우에 대비해 중앙정보부가 소지한 소총은 모두 뇌관을 때려 발화시키는 공이(격침)를 제거하는 조치를 취했다. 특히 대통령의 특명 사건을 다루고, 중정에서 최대 병력을 가진 부서인 안전국이 가장 먼저 무장해제되었다. 10·26 당시에는 부마사태로 인해 안전국의 '병력'을 대부분 부산-마산에 내려보내 서울에는 30명이 안될 정도였다고 한다(김충식, 740쪽).


중앙정보부 개편의 원칙은 국제·대북정보는 더욱 강화하고, 국내정보 중에서 필수적인 수집 분야는 남기되 조정 분야는 과감히 정리한다는 것이었다. 전두환은 부장서리 취임 1주일 뒤에 개편안이 마련되자 즉각 두 차장을 불러 10·26 사건에 책임을 지고 과장급 이상 전원의 사표를 일단 받으라고 지시했다. 


당시 중정의 수뇌부는 △윤일균 1차장(1978. 12~1980. 4)-하태준 1차장보(1979. 2~1980. 4)와 △전재덕 2차장(1978. 10~1980. 4)-정홍진 2차장보(1979. 11~1980. 4) 체제였다. 김재규 부장의 지시로 10·26 당시 궁정동 안가에서 정승화 참모총장을 접대했던 김정섭 차장보는 이미 정홍진으로 교체된 뒤였다.


전두환 부장의 인사 복안은 원래 김재규 재판에 공로가 많은 김영선 장군을 기용한 단일 차장제였다. 그런데 최규하 대통령의 결심을 받는 과정에서 해외·국내 담당 복수차장제로 바뀌어 서정화 내무차관과 김영선 장군이 각각 1·2차장으로 기용되었다. 전두환은 우선 급한 대로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조직 개편을 추진할 간부를 추가로 임명했다. 


기획조정실장에 김성진 장군(육사11기), 감찰실장에 헌병감 출신으로 서울분실장을 지낸 김만기 장군, 총무국장에 이종찬, 그리고 비서실장에 허문도 주일대사관 공보관 등 네 명이었다. 중정에 감독관으로 나온 최예섭 장군(5처장)은 보안사로 원대복귀하고, 대신 허삼수 인사처장이 중정 감독관으로 나왔다.


다음날 두 차장보를 포함해 부서장 이상 간부 40명 가운데 33명의 사표가 수리되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김만기 감찰실장(전 서울분실장), 김근수 1국장(전 안전국장), 현홍주 2국장(전 기획정책정보국장), 이상열 3국장(전 7국장), 지주선 5국장(전 특별보좌관), 김태서 6국장(전 9국장), 이동복 회담사무국장(전 회담사무국장) 등 7명뿐이었다. 이종찬 총무국장은 새 편제안을 김용갑 감찰부실장과 상의해 김성진 기조실장에게 설명했다.


처음 국내정보 분야를 대폭 줄인 결과 약 600명의 유휴인력이 남았다. 그래서 이를 300명으로 줄이는 제2안이 마련되었다. 기획조정실은 2안에 따라 100명은 퇴직, 100명은 대기 또는 재교육, 나머지 100명은 당분간 정원 초과운영 등으로 1년간 운영하는 방안을 준비했다. 이후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편제에 따라 인사안이 마련되었다. 이종찬에 따르면, 조직 개편안의 편제에서 해외공작국의 명칭만 '섭외국'으로 고치기로 하고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이종찬, 359쪽).


이종찬 총무국장은 최초 편성에서 제외된 인원은 288명이었는데 인사위원회를 열어 정리 대상자 100명을 추린 결재서류를 만들어 전두환 부장으로부터 결재를 받았다고 회고록에 기록했다. 중앙정보부 최초의 대량 해직이었다. 하지만 필자가 입수해 처음 공개하는 국가안전기획부의 공식 기록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다음주에는 ④처음 공개하는 〈陽地日誌〉, 승자의 중앙정보부 '학살' 기록 편이 이어집니다.))

 

UPI뉴스 / 김당 기자 dangk@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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