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국립서울현충원의 유골 없는 가묘들

김당 / 기사승인 : 2021-04-09 17: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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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당의 시크릿파일Ⅱ] 정보사 북파공작 국가범죄와 흑역사 4
서울현충원 53묘역의 묘지 6곳은 북파공작원의 '유골 없는 가묘'
쉬쉬하며 매장해 유족도 몰라…특수임무수행자 보상금도 못받아

1967년 8월 육군 첩보대 인천101지구대와 속초903지구대, 5개 군단(201문산대·202춘천대·203양구대·205운천대·206전곡대)에 배속된 북파 무장공작대 8개팀 48명이 휴전선 155마일 서부·중동부 전선으로 동시 침투했다가 7명이 전사했다.

 

▲ 2019년 6월 6·25 전쟁 69주년을 하루 앞두고 경기 수원시 팔달구 현충탑 위패실에서 참전용사가 헌화하고 있다. [뉴시스]


전사자 7명은 인천101지구대 소속 번개1팀 최강형 팀장과 대원 4명, 그리고 속초903지구대 소속 대원 2명 등이다. 특간 출신 장교(육군 대위)인 최 팀장을 제외한 대원들은 모두 국립소년직업훈련소 출신의 10대 소년병이었다.

 

이들은 첩보대 물색관들이 1965년 인천 국립소년직업훈련소(정원 10개과 500명)에서 감언이설로 차출해 '살인병기'로 훈련시킨 50명(7∙8기생 각 25명)의 일원이었다. 국립직업훈련소 8기생 강교춘·김용택과 이들보다 6개월 앞서 입소한 7기생 김덕재·김창덕·장정혜·전운성 등 6명이다.

 

그런데 북한측이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 부근에 이들의 시신과 유류품(遺留品)을 전시해 놓고 남한측의 정전협정 위반을 강력히 항의한 가운데, 대한민국 정부가 "북측의 자작극"이라며 침투 사실을 부인하고 시신의 인수를 거부한 사실이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처음 드러났다.

 

그렇다면 그 시신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조국 대한민국이 인수를 거부한 북파공작 전사자 시신의 행방에 대한 해답을 찾기 전에 대한민국 호국영령들이 안장된 국립묘지(현 국립서울현충원) 현황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서울현충원에 안치된 호국영령은 △6∙25 한국전쟁(1950. 6~1953. 7) △베트남전쟁(1964. 9~1973. 3) △1960년대 대간첩작전(1∙21청와대 기습,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등) 전사자가 대부분이다. 국방부 군사편찬위에 따르면, 국군은 한국전쟁에 연인원 126만여 명이 참전해 13만7889명이 전사했다. 연인원 32만5000명이 참전한 베트남전의 국군 전사자는 4601명이다.

 

이에 비해 국군 정보사가 2002년 9월 국회에 보고한 북파공작원 현황에 따르면, 국군이 북파 무장공작을 벌인 기간(1951~1972년)의 북파 요원 1만1273명 중 희생자는 7987명(2002년 국군 정보사 2차자료)이다. 베트남전 참전자의 전사율이 1.41%인데 비해 북파공작원의 희생율은 무려 70.9%나 된다.

 

북파공작 전사율, 베트남전의 50배인데 공훈비율은 1/10에 불과

 

▲ 국립서울현충원 입구 [김당]


한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호국전몰용사 공훈록' 작성 대상인원(2021. 3 현재)을 보면 △대침투(간첩)작전 3862명(경찰 444명 포함) △베트남전 3748명 △북파(무장)공작 711명 순이다. 베트남전 전사자의 81.5%(전사 4601명 중 3748명)가 공훈 대상인원임에 비해, 북파공작원은 전사자의 8.9%(전사 7987명 중 711명)만이 공훈 대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북파 무장공작의 전사율이 베트남전 참전 전사율보다 50배나 더 높은데, 북파 무장공작 전사자의 공훈 비율은 베트남전 전사자의 공훈비율의 1/10에 불과한 실정이다. 즉, 북파 무장공작원들은 죽어서도 합당한 공훈을 인정받지 못하고 '차별'을 받는 셈이다.

 

실제로 북파 무장공작 전사자는 베트남전 전사자보다 훨씬 더 많음에도 희생자 대부분이 적진에서 사망∙실종했기에 유골을 수습하지 못해 묘지에 안치되지 못하고 계급도 직급도 없는 '위패'로만 모셔져 있는 실정이다.

 

북파 무장공작을 관장한 국군 정보사는 공식적으로는 북파공작원의 존재를 부인해왔다. 하지만 베트남전 전사자보다 더 많은 희생자의 영령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는지 △서울 망월사 충령각(5300여 명) △서울 삼성동 봉은사(200명) △속초 영혈사(165명) 등 세 곳에 위패를 봉안해 왔다. 이들의 위패는 김대중 정부 시절에 과거 북파공작원들이 지옥훈련을 받아 '악마의 산'으로 불렸던 청계산 중턱에 충혼탑이 세워지면서 비로소 사찰을 벗어나 양지에 모습을 드러냈다.

 

1988년부터 한국 특전전몰장병 추모사업회를 이끌면서 북파공작원 명예회복 및 보상을 위해 활동해온 박부서 씨는 2000년 당시 김성호 의원에게 '종결 공작원 명부'를 제공해 북파공작원의 실체를 처음으로 수면 위로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박 씨는 당시 김성호 의원실 대면조사에서 "지금까지 북파공작원이 국립묘지에 묻힌 사례는 3명에 지나지 않는다. 실종자나 행방불명자는 시신을 찾을 수 없어서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한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런데 1950년대 북파공작원 출신인 박 씨의 증언은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북파공작원 대부분이 시신을 찾을 수 없어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한 것은 맞지만, 시신이 없어도 국립묘지에 묻힌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국립묘지에 유골 없는 북파공작원 묘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현충원 53묘역의 북파공작원 묘지가 유골 없는 가묘인 까닭

 

유골 없는 가묘의 존재는 남북한 사이에 치열한 응징보복전이 전개된 1960년 후반의 치열한 '저강도 전쟁' 기간에 시신조차 찾을 수 없었던 수많은 북파 무장공작원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67년 8월부터 8개팀(48명)이 서부∙중동부 전선에 동시 투입된 응징보복 작전에서 전사한 최강형 대위와 6인의 소년병들이다.

 

다행스럽게도 이들은 운 좋게(?) 국립묘지(서울현충원)에 묻혔다. 그런데 이들이 안장된 서울현충원 53묘역의 묘지가 유골이 없는 가묘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심지어 묘역을 관리하는 국립서울현충원 관계자들조차도 이들의 묘지가 유골 없는 가묘인 사실을 모를 정도다. 가묘라는 사실은 일부 전우들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된 사정은 이렇다.

 

▲ 국립소년직업훈련소 준공식을 기록한 대한뉴스 미공개영상. 1965년에 7, 8기생 50명이 육군 첩보대의 북파공작 소년병으로 동원돼 '살인병기'로 훈련되었다. [국가기록원 동영상 캡처]


김창덕 씨와 홍재곤 씨는 1965년 4월 16살에 인천의 국립소년직업훈련소에 입소한 동기생(8기)생이다. 5∙16 군사정부가 사회안정 차원에서 고아들에게 직업훈련을 시키기 위해 만든 국립소년직업훈련소는 입소 자격과 연령이 '시설에 수용된 14세부터 18세 이하의 남아아동'으로 제한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국립소년직업훈련소를 졸업하지 못했다.

 

그해 11월 45구경 권총을 찬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직업훈련소를 찾아왔다. 육군 첩보대 물색관들이었다. 이들은 '국가를 위해 더 좋은 기술을 배워 더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다'는 말로 10대 아동들을 꾀었다. 두 사람은 물색관 2명과 함께 온 군의관 2명 앞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다른 동기생 23명과 함께 북파공작원이 되었다.

 

징집 연령에 미달한 두 사람은 북파공작원 계약과 동시에 논산훈련소에서 전반기 육군 기본훈련과 후반기 무장공작원 기본훈련을 마치고 1966년 4월 27일부로 이등병 군번을 받아 첩보대 인천101지구대(위장 명칭 '한국문화사')의 '안가'로 복귀했다. 김창덕과 홍재곤은 각각 인천101지구대의 번개1팀과 번개2팀의 '폭파조'로 편제되었다. 당시 북파 무장공작대 1개팀은 장교인 팀장과 척후조(1명)∙폭파조(2명)∙전후방 경계조(2명) 등 6명으로 편제되었다.

 

두 사람은 인천 장수동의 소래산(해발 290m) 육중봉쇄 침투훈련장에서 체력훈련과 침투훈련 그리고 목표지점의 폭파·기습공격·사살·납치·노획 훈련을 지겹도록 반복한 끝에 1967년 8월 다른 6개팀들과 함께 휴전선 155마일 서부·중동부 전선으로 동시에 침투했다. 적진으로 침투해 북한군 군관 막사 건물을 폭파∙기습공격해 적병을 사살하고 장비를 노획해 오라는 중앙정보부와 한남동 HID(첩보대) 본부의 전통(電通) 지령에 따른 것이었다.

 

홍 씨는 17살 때부터 3년간 13번이나 무장공작에 투입되고도 운 좋게 살아남아 하사관으로 양성화돼 국군정보사에서 32년간 근무하고 원사로 전역했다. 하지만 김창덕 씨는 첫번째 북파 무장공작에서 번개1팀 전우들과 함께 전사했다. 그나마 다른 전우들보다 다행(?)인 것은 시신이나마 가족의 품에 돌아온 점이다.

 

정부 "북한측 자작극"이라며 북파공작 전사자 시신 인수 거부

 

▲1968년 6월 당시 남측이 북한으로 침투한 간첩선을 노획한 것이라며 북한측이 판문점 군사정전위 본회의장 주변에 전시한 보트 [국가기록원]


이행근 팀장이 지휘한 번개2팀은 양구 21사단 관할 GOP(전방초소) 철책선 통문으로 침투해 북한군 군관 막사 폭파 임무를 완수하고 천신만고 끝에 귀환했다. 하지만 최강형 팀장이 지휘한 번개1팀은 인제 12사단 관할 GOP 철책선 통문으로 침투했다가 척후조 1명만 빼고 전원이 전사한 것이다. 속초903지구대의 직업훈련소 동기생 강교춘∙김용태도 돌아오지 못했다.

 

12사단 관할 GP 관측소에서 포대경으로 관측한 바에 따르면, 번개1팀은 침투하자마자 적 목표지점에서 북한군과 교전이 발생한 것으로 관측되었다. 김창덕은 교전에서 부상을 입고 가까스로 남강 쪽으로 탈출했으나 피를 많이 흘려 사망했다. 12사단 GOP 아군이 남강으로 시신이 떠내려와 남방한계선 철책선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해 인양한 것이다. 군의관이 사망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검시해보니 북한군 AK소총 총탄 부상으로 판명돼 교전 중 전사로 판정되었다.


하지만 인천101지구대 번개1팀의 다른 대원들과 속초903지구대 동기생 2명의 시신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아니, 시신이나마 조국의 품에 안길 기회는 있었는데 대한민국이 이들의 시신 인수를 거부했다. 북한측이 판문점 군사정전위 본회의장 주변에 이들의 시신과 유류품을 전시하고 정전협정 위반을 항의하자, 정부가 "북한측의 자작극"이라며 북파공작 사실을 부인하고 시신 인수를 거부한 것이다.

 

언감생심, 국립묘지 안치는 꿈도 꾸지 못했던 다른 북파공작 전사자들과 달리 그나마 이들에게 불행 중 다행은 김창덕의 전사가 확인돼 유골이 없어도 모두 1계급 특진 추서(대위→소령, 하사→중사)와 함께 가묘로나마 안치된 것이다(명단은 아래 [표] 참조). 문제는 정부와 군당국이 이들의 죽음을 쉬쉬하며 보안에 부치는 바람에 유족들도 이들의 전사 통지를 못받았거나 묘지가 가묘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다.

 

[표] 서울현충원 제53∙54묘역의 '유골 없는 북파공작원 가묘' 현황

성명

역할

특진 추서일

묘지 (묘역번호)

출신별

최강형

팀장

소령(1967. 9)

가묘 (54-1898)

특간 출신

김창덕

폭파조

중사(1967. 9)

* (53-31153)

국립소년직업훈련소(7기)

김덕재

경계조

중사(1967. 9)

가묘 (53-31154)

국립소년직업훈련소(7기)

장정혜

폭파조

중사(1967. 9)

가묘 (53-31155)

국립소년직업훈련소(7기)

전운성

후방경계조

중사(1967. 9)

가묘 (53-31156)

국립소년직업훈련소(7기)

김용택

경계조

중사(1967. 9)

가묘 (53-31157)

국립소년직업훈련소(8기)

강교춘

폭파조

중사(1967. 9)

가묘 (53-31158)

국립소년직업훈련소(8기)

 * 김창덕의 묘를 제외하곤 모두 유골이 없는 가묘임


▲ 홍재곤 씨가 서울현충원 제53묘역에 묻힌 전우들의 유골없는 가묘에 소주를 따르고 있다. 다른 전사자들의 묘비와 달리 이들의 묘비에는 전사한 장소가 빈칸으로 남아 있다. 적진에 무장공작 침투했다가 전사한 사실을 기록으로 남길 순 없기 때문이다. [김당]


너나없이 보릿고개에 허덕인 가난한 시절 국립소년직업훈련소는 국가가 먹여주고 재워주고 입혀주고 기술까지 가르쳐주는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다. 입소 자격과 연령은 '시설에 수용된 14세부터 18세 이하의 남아아동'으로 제한되었다. 즉, 이곳에서 북파공작원으로 물색 된 소년병들은 대부분 고아여서 형제들 말고는 유족이 없었다.

 

홍재곤 씨도 8세에 아버지를 잃고 부산의 한 육영시설에서 누이동생과 함께 지내다가 기술을 배우러 국립소년직업훈련소에 입소했다가 물색관의 감언이설에 속아 '살인기술'을 배우는 북파공작원이 되었다. 훈련기간에는 말할 것도 없고, 북파 공작기간에도 보안을 이유로 가족과의 연락이 일체 단절되었다. 이로 인해 홍 씨는 지금도 누이동생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

 

홍 씨는 해마다 6월이면 서울현충원의 전우들 묘지를 찾아왔지만 한번도 유족들을 만난 적도 유족이 다녀간 흔적을 찾을 수도 없었다. 홍 씨는 유골 없는 소년병 전우들이 명예를 회복하고 이들의 형제들이라도 보상을 받게 하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해왔다.

 

북파공작원들 묘비에 전사한 장소가 빈칸으로 남은 까닭

 

홍 씨는 국방부와 국군정보사, 그리고 국민신문고 등을 통해 "국립소년직업훈련소 출신인 김창덕, 김덕재, 장정혜, 전운성 등은 부모 없는 고아들이지만 형제자매 한 사람은 있을 것"이라며 정보사 특수처가 보관하고 있는 마이크로필름에 있는 유족과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신상정보 등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전우인 홍 씨가 확인을 요청해도 국방부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지원단은 "보상 여부는 비공개"라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유일한 성과라면 "고(故) 김창덕의 누님이 유족 보상금을 수령했다"는 구두 확인뿐이었다.

 

▲ 특수임무유공자 요건 관련 사실확인서 등을 정보공개청구한 것에 대한 회신문. 국가 안전보장 등을 이유로 공개할 수 없다고 회신했다. 


기자도 '특수임무유공자 요건 관련 사실확인서' 등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지원단에서 생산한 문건에 대해 정보공개청구를 했지만, "국가 안전보장에 관련되는 정보 및 공개될 경우 국가의 중대한 이익을 해칠 우려가 있는 정보" 등을 이유로 공개할 수 없다는 회신을 받았다.

 

서울현충원에 따르면 제53묘역은 1960년대 순직한 분들을 모시기 위해 조성된 묘역으로 이원등 상사를 비롯하여 총 829위가 안장되어 있다. △1967.8. 27 00:30 남침해 온 적과 교전중 적탄에 맞아 전사 △대간첩작전을 위해 작업중 1967. 9. 6 숲속 인계철선 건드려 M16 대인지뢰가 폭발하여 순직 등의 사례가 적시돼 있다. 하지만 북파공작 전사자들을 지칭하는 설명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 서울현충원 제54묘역 최강형 소령의 묘지. "1967년 9월 강원 철원에서 전사"라는 묘비명과 달리 최 소령은 북강원도 적진에 침투해 무장공작 임무를 수행하다가 전사했다. 정부가 시신 인수를 거부해 유골이 없는 가묘이다. [김당 ]


제54묘역의 고(故) 최강형 소령을 제외한 홍 씨의 북파공작 소년병 전우들은 제53묘역에 나란히 묻혀 있다. 최 소령만 묘비에 "1967년 9월 26일 강원 철원에서 전사"라고 기록돼 있고, 대원들은 모두 "1967년 9월 29일 순직"으로 기록돼 있다.

 

묘비에 "○○에서 전사"라고 적힌 다른 전사자들과 달리 이들은 전사한 장소가 표기돼 있지 않고 빈칸으로 남아 있다. 적진에 무장공작 침투했다가 전사한 사실을 기록으로 남길 순 없기 때문이다. 물론 최 팀장이 전사했다는 '강원 철원'도 사실과 다르다.

 

홍 씨는 해마다 6월이면 서울현충원을 찾아 전우이자 국립소년직업훈련소 동기들의 묘지에 소주를 한 잔씩 따른다. 더러는 감정에 복받쳐 17~19세 꽃다운 나이에 전사한 전우들의 유골 없는 가묘의 비석을 끌어안고 이렇게 하소연한다. 지난 3월 기자와 함께 서울현충원 제53묘역을 찾았을 때도 그랬다.

 

"정부가 그때 침투 사실을 인정하고 전우들의 시신을 인수했다면 유족의 품에 안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부가 시신 인수를 거부한 것은 끝없이 반복된 응징보복전에서 북파 공작원들을 '1회용 소모품'으로 취급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라도 왜 이곳에 유골 없는 가묘가 있는지 사실을 밝히고 유족을 찾아 무공훈장을 수여하고 명예회복과 보상을 해줘야 합니다."

 

((계속해서 '북파 공작원들이 받은 공훈과 무공훈장' 편이 이어집니다.))

UPI뉴스 / 김당 대기자 dangk@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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