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북파공작 무공훈장 공적서도 조작됐다

김당 / 기사승인 : 2021-04-22 11:4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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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당의 시크릿파일Ⅱ] 정보사 북파공작 국가범죄와 흑역사 5
'북파공작 공훈'이 '대간첩작전 공훈'으로 둔갑…'북파공작' 숨기려
"'황소공작'은 충무무공훈장만 12개 받은 울진∙삼척침투 보복작전"
75년 귀순 북한군 GP장 신문첩보로 "소련군사고문관 사살" 확인
소련군사고문관 공식 철수연도(58년)와 달라…학계 조사연구 필요

1968년 12월 12일 육군 첩보부대장 조천성 준장(육사8기)이 6군단에 배속돼 북파 무장공작을 벌여온 205HID첩보대(경기도 포천군 영북면 운천리 소재)를 찾았다. 첩보부대원들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하기 위해서였다.

 

▲ 1971년 11월 1일 김종필 국무총리(가운데 선글라스 쓴 이)가 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 백마부대를 찾아 육사8기 동기생인 조천성 9사단장과 반갑게 악수하고 있다. 그 뒤로 전두환 대령(9사단 29연대장)이 철모를 쓰고 서 있다. [김종필 전 총리비서실]

 

한 달여 전에 울진∙삼척지구에 침투한 120명의 '무장공비(共匪; 공산비적) 소탕작전'이 아직 경북 내륙과 강원도 일대에서 진행중인 때였다. 205첩보대장 소○영 중령과 공작과장 김원한 소령, 공작담당관 정○백 소령 등이 조 장군을 영접했다.

 

영 중령은 을지무공훈장, 김원한∙정백 소령에게는 충무무공훈장이 수여되었다. 205운천대의 김동 팀장(대위)과 홍재곤 하사 등 팀원 4명, 서울남산대의 팀장과 팀원 4명, 206전곡대의 팀장과 팀원 4명 등이 모두 충무∙화랑∙인헌무공훈장을 받았다. '황소공작'에 직접 참여했거나 지원한 공로였다.

 

홍씨만 국립소년직업훈련소에서 첩보대에 물색된 인천101지구대 출신이고, 다른 대원들은 모두 '목장1기생' 출신이었다. 목장 출신이란 1967~1972년 동안 전국에서 물색돼 경기도 성남의 청계산 '목장'(교육장)에서 3개월 동안 훈련받은 민간인 출신 공작원을 지칭했다.

 

'목장'이 배출한 '돼지'(공작원)들을 포천 성동리의 첩보대 안가(안전가옥)에서 '사육'(관리)한 일명 '키퍼(Keeper; 조교 역할)'와 취사요원은 훈장 대신 표창장을 받았다. 안가에서는 통신∙살인∙폭파∙독도법 등을 가르쳤다. 무장공작은 통상 1개조당 5~6인을 편성해 투입했다.

 

무공(武功)훈장은 전시 또는 전시에 준하는 비상사태 하에서 전투에 참가하여 그 무공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 훈격은 태극(Taegeug), 을지(Eulji), 충무(Chungmu), 화랑(Hwarang), 인헌(Inheon) 무공훈장 순이다. 충무무공훈장은 미군의 은성무공훈장과 동격으로 간주된다.
 

홍재곤 하사가 받은 충무무공훈장의 무공훈장증서 

홍재곤 하사(군번 80068100)가 받은 충무무공훈장의 무공훈장증서(사본)에는 그 공적이 이렇게 기재돼 있다.

 

▲ 홍재곤 하사가 받은 충무무공훈장의 훈장증서 사본. 수여자가 "1968. 12. 12 대통령 박정희"인 이 증서에는 "1968년 11월 15일 작전지역 내에 북괴 무장공비들이 침입하자 치밀한 작전계획과 용맹성을 발휘하여 혁혁한 전과를 거둔 공로"라고 허위로 기재돼 있다. 실제로는 적진에 침투해 북한군 진지를 폭파하고 소대병력을 기습공격한 공로로 받은 훈장이다.

 

"귀하는 투철한 군인정신과 왕성한 책임감으로 평소 국토방위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여 왔으며 특히 1968년 11월 15일 작전지역 내에 북괴 무장공비들이 침입하자 치밀한 작전계획과 용맹성을 발휘하여 혁혁한 전과를 거두었기에 그 공로를 높이 찬양하여 대한민국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권한에 의하여 이에 충무무공훈장을 수여함. 대통령 박정희, 1968. 12. 12. 국무총리 정일권, 총무처장관 이석제"

 

홍씨가 받은 무공훈장증서와 공적은 국군 정보사령부의 사실 확인과 당시 첩보대 공작과장을 지낸 김원한 대령(예, 갑종61기)의 증언으로 교차 확인된 것이다. 국군 제9965부대장은 홍씨의 사실확인 요청에 '황소공작'을 포함해 "특수임무수행 13회" 사실을 문서로 확인해 주었다. 제9965부대는 정보사의 대외부대명이고, 정보사의 '특수임무수행'은 '북파공작'을 지칭한다.

 

국군 제9965부대장이 발급한 '복무사실 확인서'(99. 12. 27)에는 홍씨의 복무사실 내용이 이렇게 확인된다.

 

"1998. 6. 30일부로 당부대 원사(예)로 명예 전역한 자임. 68. 6. 15~11. 16일 강원도 하진리(CT535417)에서 복무한 사실이 있음을 확인함"

 

얼핏 보면 홍재곤 원사가 정보사 재직 중에 '1968년 6월 15일부터 11월 16일까지 강원도 하진리에서 복무한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다.

 

그런데 '68. 6. 15~11. 16' 기간은 홍씨가 강원도 철원 3사단 관할 GOP 근처 민통선에서 야전천막을 치고 황소공작을 포함한 북파 무장공작을 수행한 시기이다. 또한 'CT535417'은 남한 지역이 아니고 적진인 '북강원도 평강군 하진리'의 지도 좌표이다. 즉 "강원도 하진리(CT535417)에서 복무한 사실이 있음"은 적진에서 황소공작을 수행한 사실이 있음을 확인해준 것이다.

 

김원한 대령 역시 UPI뉴스와의 통화에서 사실 확인을 해주었다. 김 대령은 육군 첩보부대 출신으로 3년 이상 공작부서에서 근무한 장교 모임인 진백회(眞白會) 회장을 지낸 북파공작의 산증인이다. 김 대령은 첩보부대와 정보사를 거치는 동안 공작과장·첩보과장·남산대장을 역임하면서 대북 응징보복 공작이 가장 치열했던 1960년대 후반에 전방부대에서 무장공작을 지휘했다. 

김원한 대령 "1∙21 이후 '황소공작'으로 충무무공훈장만 12개 받았다"

 

▲ 북한군 특수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기습공격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1968년 1.21사태는 한국 안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해 4월 1일 창설한 향토예비군 발대식에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구호가 보인다. [국가기록원]


"1∙21사태 이후 다양한 응징보복 작전을 수행했다. '황소공작'도 그중 하나였는데, 황소공작으로 충무무공훈장만 12개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휘하에 있던 홍재곤 하사도 그때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런데 앞서의 훈장증서 공적 내용을 보면, 적진에 침투해 북한군 진지를 폭파하고 소대 병력을 몰살한 '황소공작'의 공로가 아니라 '아군 지역에 침투한 북한 무장공비 소탕작전에서 세운 전과'로 무공훈장을 수여한 것으로 허위 기재돼 있다.

 

이런 공적서 조작은 비단 홍씨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UPI뉴스는 관련자 취재를 통해 당시 다른 북파 공작원들의 무공훈장증서도 '허위'로 기재돼 있음을 확인했다. 무공훈장증서에 북파 무장공작의 공적을 사실대로 기재할 경우 정전협정 위반을 자인하는 셈이 되기 때문에 생긴 '하얀 거짓말'일 수는 있다. 문제는 이런 '하얀 거짓말'이 역사 왜곡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무공훈장은 '전시 또는 전시에 준하는 비상사태' 하에서 전투에 참가해 그 '무공이 뚜렷한 자'에게 수여하는 훈장이다. '황소공작' 팀원들은 적진에 침투해 북한군 장교를 포함해 22명을 사살한 전과로 을지∙충무∙화랑∙인헌 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렇다면 아군지역이 아닌 적진에서 '무공이 뚜렷한' 정도를 어떻게 입증할까? 물론 최전방 아군 GP에서 적진의 동향을 포대경으로 관측하거나 감청에 의해 전과를 확인한 것은 기본이다. 또 북파 무장공작은 본업(?)이 폭파∙살해∙납치인 만큼 적 지휘관을 납치해 오면 그것으로 입증은 끝난다. 북파공작원의 개인 휴대장비에 포승줄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해상이라면 몰라도 적진에서 지휘관을 납치해 육로 귀환하기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또한 작전 현장에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돌발변수들이 발생한다. 그래서 생포하지 못하면 사살하고 군관이 소지한 소련제 떼떼(T.T; Тульский Токарева) 권총 같은 입증 장비를 노획해오는 것이다.

 

▲ 1968년 7월 유엔군측이 판문점 군사정전위 본회의장 근처에 군사분계선을 넘어 침투한 북한군을 사살해 노획한 장비를 전시해 놓았다. [정부기록사진집]


역으로 북한의 대남 무장침투가 북한측에 의해 확인되는 일도 있었다. 1966년 10월 21일 북한군이 군사분계선(MDL)을 넘어 우리측 비무장지대(DMZ)에 잠입해 있다가 국군 식량 운반차량을 습격해 국군 6명을 살해하고 3명에 중상을 입히고 1명을 납치해 간 사건이 발생했다. 남측이 군사정전위 소집을 요구하며 항의하자 북측은 사실무근이라고 발뺌했다.

 

그런데 이 사건의 진상은 이듬해 2월 10일 제241차 본회의에서 밝혀졌다. 이날 회의 1주일 전에 북한군 여러 명이 동부전선에서 MDL을 넘어와 국군 GP를 공격하자 쌍방 교전이 벌어져 북한군 1명이 사살되었다. 이에 군정위가 소집되었는데 북측은 국군이 무장간첩 3명을 침투시켰다고 억지를 부리면서 증거물로 국군으로부터 수거했다는 미제 카빈총 1정을 회의 탁자 위에 올렸다.

 

그러자 유엔측 군정위 대표가 그 카빈총을 집어들고 '일련번호 7415502'라고 총기번호를 크게 불렀다. 일련번호는 즉각 서울로 전달돼 조사한 결과, 앞서 1966년 10월 북한군이 서부전선 DMZ 안에서 국군 식량 운반차량을 기습해 현장에서 훔쳐간 카빈총 중의 하나였음이 확인되었다. 북한군의 무장침투 사건이 확인됨과 동시에 북한군의 무기 관리가 엉망이었음이 드러난 셈이다.

북한군 12사단 707GP장 유대윤 소위의 귀순과 교차검증

귀순한 북한군에 대한 신문(訊問) 과정에서 북파공작의 전과가 교차 검증되기도 한다. 강원도 평강군 북한군 12사단 관할 지역의 정치보위부 군관과 1개 소대병력(32명) 기습공격 임무를 수행한 '황소공작'의 전과도 그런 경우이다. 북한군 12사단 707GP장인 유대윤 소위가 1975년 3월 강원도 철원 금화지구 휴전선을 넘어 귀순해 얻은 성과였다.

▲ 1975년 3월 북한군 장교로 복무하다가 귀순한 김부성·유대윤(오른쪽)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유 소위는 땅굴 관련 정보 등을 제공한 공로로 귀순 5개월만에 북한 육군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국가기록원]

  

유 소위는 귀순 이후 신문 과정에서 몇 가지 중요한 군사정보를 제공했다. 당시 한국군에 필요한 북한군 제2땅굴 정보 말고도, 이른바 '3∙7완전작전' 및 '황소공작'의 전과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다.

 

전방에서 5년 근무한 유 소위는 1972년 7월부터 강원도 평강군 전승리 북방한계선 상의 땅굴 갱도입구에서 1km 떨어진 곳에 근무해 땅굴 지형을 잘 알고 있었다. 유 소위는 관련 정보를 제공한 공로로 귀순 5개월만에 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휴전 이후 북한군이 국군으로 임관한 사례는 공군 4명, 해군 1명이 있었을 뿐 육군으로서는 유 소위가 처음이었다.

 

'3·7완전작전'은 1973년 3월 7일 3사단(백골부대) 예하부대의 수색중대장 등 5명이 푯말 보수작업을 하던 중 적 GP의 총격도발로 아군이 부상당하자 사단장(박정인 장군)이 포병사격을 명령해 적 GP를 완전 초토화시킨 전투를 말한다. 적 피해 규모는 2년 뒤에 유대윤 소위가 귀순하며 세상에 알려졌다.

 

유 소위는 "당시 백골부대 포탄이 GP를 명중해 29명 전원이 몰살당했고, 배치된 사단이 교체되는 문책이 있었다"며 "이때부터 북한에서는 백골부대를 가장 두려워하는 부대로 생각하게 됐다"고 증언했다. '3·7완전작전'은 6∙25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북한에 포격을 가해 적진을 초토화시킨 응징보복으로 기록되었다. 3사단은 이를 기념해 해마다 기념행사를 갖는다.

 

육군 첩보부대 205운천대는 1968년 6월부터 3사단 관할 GOP 근처 민통선(민간인통제선) 지역에 야전천막을 치고 전선공작을 수행했다. 그해 1월 북한 특수군 124군부대원 31명이 청와대를 기습공격하려 했던 1∙21사태에 대한 응징보복으로 오성산(7월)∙호랑이(8월)∙태풍(9월)∙무지개(9월) 북파 무장공작을 전개한 것이다.  

 

205운천대는 그해 10월 25일 남산 HID본부로부터 작전명 '황소1호' 북파 무장공작 임무를 부여받았다. 9월에 실패했던 무지개공작(적 12사단 관할 적진에서 군관 납치)의 연장선 상에서 북한군 진지를 기습공격해 군관을 납치해오라는 임무였다.

 

문제는 임무를 수행하려면 두 달 전에 북방한계선 북한군 잠복호를 기습해 잠복조 5명 등 7명을 사살하고 AK소총을 노획(호랑이공작)했던 곳을 통과해야 했다. 팀장과 팀원들이 위험하다며 반대했다. 이에 정○백 공작담당관은 지형정찰과 5만분의 1 적 지도와 항공사진으로 좀더 연구해보자고 일단 작전을 유보했다.
 

1968년 10~11월 울진∙삼척지구에 침투한 120명의 북한 무장게릴라

 

▲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소탕작전'에 동원된 군견과 수색대원들 [국가기록원]

 

그러는 와중에 10월 30일~11월 2일 사이에 3회에 걸쳐 울진∙삼척지구에 120명의 북한군 무장게릴라가 침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특수부대원 120명(1개조 15명씩 8개조) 침투는 6∙25 한국전쟁 이후 최대 인원의 무장게릴라 침투였다. 공수특전단(1개 연대)∙해병1사단(1개 대대)과 육군 6개 사단(1~2개 연대 또는 대대), 그리고 그해 4월에 창설된 향토예비군까지 참여한 대대적인 '무장공비 소탕작전'(11. 2~12. 28)이 전개되었다.

 

그러자 11월 6일 오전 남산 HID본부에서 205운천대로 침투∙폭파 명령이 긴급 하달되었다. 이에 11월 8일 야음을 틈타 척후조 임○호, 팀장 김○동, 폭파조 홍재곤, 측방경계조 최권, 후방경계조 이우 등 황소공작팀 5은 일렬종대를 지어 철원 평야 DMZ의 2m 높이 갈대 숲으로 잠입했다. 다행히 우려했던 '호랑이공작'의 북한군 잠복호는 폐쇄된 상태였다.

 

황소공작팀은 MDL과 북방한계선 사이에 설치된 북한군의 육중봉쇄 장애물을 뚫고 15일 마침내 부여받은 목표지점(CT432234)에 도달했다. 황소공작팀은 인마살상용 M18 크레모아(클레이모어) 4발을 설치하고 평강고원의 갈대숲에 몸을 숨기로 때를 기다렸다.

 

이튿날 아침 예상대로 목표대상인 정치보위부 군관과 2개 분대병력(22명)이 황소공작팀이 매복한 곳에 나타났다. 그런데 갑자기 검정 승용차가 도착하더니 차에서 '코가 큰 외국인'이 내렸다. 소련제 68년식 신형 아카보(AK) 소총으로 무장한 북한군은 군관과 '코 큰 외국인'을 호위하면서 2열 종대로 전방정찰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김○동 팀장은 검지손가락으로 '코 큰 놈을 납치하라'는 완수신호를 보냈다. 팀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북한군 22명이 모두 크레모아 사살 반경 안으로 들어오자 격발 스위치를 누름과 동시에 수류탄을 투척했다. 평강고원의 갈대 군락지가 일순간에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북한군이 혼비백산한 틈을 타 '코 큰 놈'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고 폭발에 넋이 나가 주저앉은 군관만 눈에 띄었다. 폭파조 홍재곤과 척후조 임○호가 원래 목표였던 군관을 납치용 포승줄로 묶으려는 순간, 근처에서 작업중인 북한군 60여명이 폭발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두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군관을 사살하고 떼떼(T.T) 권총만 노획해 귀환했다.

 

홍재곤 등 팀원의 일부만 부상을 입었을 뿐, 사상자가 없이 전원 귀환했으니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며칠 뒤에 북한군 50여명이 3사단 관할 아군 507GP를 둘러싸고 기습 보복공격을 가해왔다. 조명탄이 터진 가운데 남방한계선 철책의 GOP에서 관측하니, 북한군 방망이수류탄과 아군의 세류수류탄이 교차하는 가운데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GP 공격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북한군의 보복 의지가 강했던 것이다. 다행히 장애물 피해 말고는 아군의 인명 피해는 없었다. 당시는 '북한이 한번 공격하면 세 배로 갚아준다'는 것이 북파 공작부대의 불문율이었다. '황소공작'도 1968년 1∙21사태 이후 중동부 전선에서 하루가 멀다고 벌어진 '피의 보복' 중의 하나였다. 직접적으로는 울진∙삼척 침투에 대한 응징보복이었다.

 

유대윤 소위는 신문 과정에서 1968년 11월 16일 북한군 12사단 관할 전연(전방)지역에서 남측 북파 무장공작대의 기습공격을 당해 2개 분대 병력과 군관과 함께 있던 소련 군사고문관이 사망했다고 진술했다. 검정 승용차에서 내린 '코 큰 놈'은 소련 군사고문관이었던 것이다.

 

적진의 작전 현장에서 갑자기 맞닥뜨린 '코 큰 놈'

 

소련 고문관 관련 '전과'가 정부측 공식 문서나 전사(戰史)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김원한 대령과 홍재곤 등 '황소공작' 임무를 수행해 무공훈장을 받은 다수의 참가자들이 관련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물론 임무를 하달 받을 때는 소련 군사고문관에 관한 정보나 지시는 전혀 없었다. 다음은 폭파조 홍재곤 씨의 증언.

 

"10월에 처음 황소공작이 부여될 때는 물론, 울진∙삼척 사태 이후 같은 임무가 하달될 때도 소련 군사고문관에 관한 정보는 없었다. 적진에 임무를 수행하러 가서 현장에서 갑자기 소련 군사고문관으로 추정되는 '코 큰 놈'을 맞닥뜨린 것이다. 그래서 현장에서 김 팀장이 '코 큰 놈을 잡자'고 완수신호를 보내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김 팀장은 작고했지만, 저뿐만 아니라 측방경계조 최○권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 1945년 9월 말 미군 사진병 돈 오브라이언(Don O' Brien, 왼쪽)이 38도선 인근에서 소련군을 만나 찍은 기념사진. [돈 오브라이언 flickr 캡처]


'황소공작'과 소련 군사고문관 사살의 연관성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과제를 부여한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 따르면, 소련 국방부의 대외협력기구인 군사고문단이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활동한 기간은 '1948년 12월부터 1953년 7월까지'로 돼 있다. 하지만 실제 활동 기간은 초대 군사고문단장인 스미르노프가 입국한 1946년 9월부터 군사고문단이 완전 철수한 1957년 5월까지로 본다(심헌용, 주북한 소련 군사고문단 연구).

 

이 기간 동안 북한군 건설과 군사력 증강, 군사전문가 양성, 군사무기 및 장비 제공과 운영, 그리고 전쟁 지도까지 전폭적 지원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황소공작팀이 1968년 11월에 노획한 최신식(68년식) AK소총도 고문단의 군수지원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군사편찬위의 '국방사건사'에 따르면, 1960년대 중후반은 중∙소 이념분쟁과 중국 문화혁명 홍위병들의 김일성 비판 이후 북한이 '자주노선'을 선언하고 친중국 노선을 탈피해 ∙소 간에 한창 군사∙경제 및 기술협정(1967~1970년)을 체결할 때이다. 당시 소련과 북한은 부수상급 고위급 접촉이 빈번할 때여서 이와 관련된 소련 인사들이 전방 시찰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주북한 소련 군사고문단의 북한군 지원활동' 연구에 따르면, 소련 군사고문단은 군사고문, 군사교관, 군가전문가, 통역원, 사무 및 기술 보조요원 등으로 구성되었고, 조직 규모는 연도별 최대 2천~3천명으로 파악한다. 고문관들은 인민군 각 병종의 연대급 이상의 부대에 배치되었다. '소련 군사고문관의 북한군 산하 배치편제'를 보면, 일선 대대장 및 부대대장급에도 군사고문이 편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성훈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은 "1968년에 소련 군사고문관이 북한에 존재했다는 것이 사실이면 기존 연구를 뒤집는 것"이라며 "비공개 상태인 1968년도 군사정전위 본회의 회의록 열람이나 연구가 필요할 것 같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국방부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심의위는 특수임무 관련 사실확인서 등의 정보를 국가 안보∙외교 상의 이유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UPI뉴스 / 김당 대기자 dangk@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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