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호의 문학공간] "오늘도 절을 하며 신파처럼 낡은 창을 연다"

조용호 / 기사승인 : 2021-05-07 08:5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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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 펴낸 박남준 시인
지리산 자락 '멸종위기 시인'의 깊어진 시선
절을 하며 놓친 생각들 그러모아 음각
인도 몽골 등지를 떠돌며 외연도 확장

"푸른 바다가 들어와 머물기도 했지/ 발목을 빠져나간 늙은 양말이 눈에 밟히며/ 애써 이룬 수평을 흔들었다/ 젊고 뻔뻔한 후회가 스치며 혀를 깨물게도 했네/ 여기까지는 얼마나 흘러왔는가/ 지문을 찍듯 엎드려/ 낮고 겸손한 바닥을 몸에 새기는 것만이/ 절은 아닐 것이다/ 절은 할수록 절로 늘어/ 뼈마디마다 불꽃을 피우고/ 육탈 같은 다비가 일어나기도 한다/ 꽃잎의 주소를 따라가면 환해지고는 했지/ 강가에 나가 꽃배를 띄웠다/ 일상이 간절해야지/ 점점 작고 가벼워져/ 꽃배를 타고 건너가야지"('절')

▲여덟 번째 시집을 펴낸 박남준 시인. 그는 "예전에는 시에 대해 조바심을 냈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물끄러미 바라보게 된다"고 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지리산 자락에 사는 박남준 시인은 어느 단체로부터 백배(百拜)를 올릴 때 매번 마음속으로 기원하는 문구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내가 고요해지는 눈을 뜨게 해주길 바라며 첫 번째 절을 합니다… 이런 식의 짧은 글들이 그것인데, 오래된 그 청탁을 아직까지 완수하지 못했다. 대신 절의 호흡을 알기 위해 날마다 절을 하다 보니 시가 써지기 시작했다. 젊은 시절 뻔뻔한 치기가 떠올라 혀를 깨물고 싶기도 했고, 창문을 열어놓고 절을 할 때는 문 밖으로 향한 시선에 걸리는 것들이 마음을 적셨다. 절을 하면서 그는 새삼 일상이 간절해져야 한다는, 더 작아지고 가벼워져야 한다는 다짐을 한다. 그렇게 절을 하는 마음으로 쓴 시들을 묶어 6년 만에 새 시집 '어린왕자로부터 새드 무비'(걷는사람)을 펴냈다.

 

젊은 시절에는 전주 인근 모악산 빈 집에서 지내다가 다시 지리산 자락 하동군 악양으로 이사와 내내 홀로 수도하듯 건너오는 동안, '어린 왕자' 같던 미소년의 머리칼도 이제 은발이 되었다. 그가 악양에서 누리는 삶은 남미 가수 비올레타 파라의 노래 '생이여 감사합니다' 같은 '인사말'에 가지런히 담겨 있다. '이웃들, 벗들, 새와 달과 양철지붕에 내리는 빗소리와 별과 나무 그리고 텃밭의 벌레와 채소들과 찾아오는 손님들과 지고 뜨는 해와 꽃등처럼 내건 곶감과 마당의 꽃들과 아침 고요한 차 한 잔과 처마 끝 풍경소리와 계절마다의 비바람과 함박눈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네/ 또한 깊은 밤 자꾸 방 안으로 기어 들어오는 개울물 소리와 푸른 하늘과 따뜻한 장작더미와 삶의 뜨락을 쓸어 주는 인연의 빗자루와 혼자 먹는 밥상의 쓸쓸함과 그 밥상 위의 장식이 되어 준 생명들과 내 안의 웃음과 미움과 분노와 눈물과 슬픔과 사랑들께 깊이 허리 숙이네 가엾은 내 몸과 영혼이여 고마워요 거듭 감사드리네'

 

자연에서 주로 시를 채취해 온 그를 문단의 아우는 농담조로 희롱했다. 박남준은 '한창훈의 말을 빌면/ 내 시는 집 주변을 넘지 않는다네/ 마당의 풀꽃 이름과 나무 둬 그루로 운을 떼고/ 텃밭의 채소와 벌레를 엮어/ 어눌한 말투처럼 풀어놓다가/ 새나 나비 등이 권속으로 간을 맞추면/ 얼추 끝난다는데// 시도 영혼도 그렇게 날개 달아 훨 훠얼/ 병든 문밖을 날려 보낼 수 있다면/ 불면의 이 새벽 내내 쓰고도 좋으련만'이라고 하소연한다. 한창훈의 농 때문은 아니겠지만 이번 시집에는 멀리 떠나 인도 몽골 카자흐스탄 등지를 돌아다닌 체험도 형상화돼 외연이 더 넓어진 것도 눈에 띈다.

 

"그 사막의 초원에는/ 두 줄의 현악기, 톱쇼르를 안고/ 풍찬노숙의 길 위에 현을 긋는 이가 있다/ 토올치,/ 외로움과 고독이라는 해자를 파고/ 멀리 외따로 혼자 산다는 멸종위기/ 시인이라 부르는 소수 종족이라네// 모래의 기도가 쌓아 올린 황금의 사원/ 사막의 사구에 붉은 저녁이 오는가/ 바람을 부르며 허공을 건너는/ 수염수리의 긴 휘파람으로/ 토올치가 노래 부르면/ 길을 잃은 슬픈 별들이 찾아와/ 밤새 상처받은 영혼을 씻는다지// 사막에 비가 오면 작은 부추꽃들/ 무리무리 별빛을 빚어 초원을 펼치는 것/ 날개를 찾은 별들이 하늘로 오르며 떨군/ 맑고 환한 눈물의 은유라네/ 몽골의 밤하늘에 깊고 푸른 별들/ 더 많고 반짝이는 바로 그 까닭이라네"('사막의 은유')


'톱쇼르'란 몽골의 두 줄 현악기를 이르는 말이고, 톱쇼르를 연주하며 몽골의 대서사시를 들려주는 시인이 '토올치'다. '외로움과 고독의 해자'를 파고 세상과 떨어져 사는 '멸종위기 시인'이라는데, 몽골 여행 동반자 한 사람은 박남준이 그렇다고 했다. 별들이 자욱히 부추꽃처럼 지상에 내려와 밤새 상처받은 영혼을 씻고 다시 날개를 찾아 하늘에 올라, 유난히 맑고 환한 빛을 비추는 듯한 몽골 밤하늘. 멸종위기 시인은 그때 이미 '어린 왕자'처럼 그 하늘을 올려다보며 돌아갈 곳을 떠올린 것일까.

 

"불시착의 연속에 있었다/ 바오밥나무들이 점등을 하는/ 비상활주로의 길 끝에 사막은 시작되었다/ 사막이 공간 이동으로 뛰어든 이유는/ 불시착의 그 처음이 발단이었다는 정도로 생락하겠다/ 그리하여 그리움이 사막을 메아리쳤다// (…)// 밤하늘에는 불시착을 한 채/ 이 별에서 살아온 그 시간이 상영될 것이다/ 오오오 새드무비♬~/ 서툰 배역은 견딜 수 있을 만큼만 고통스러웠다/ 잔기침쟁이 장미와 사막여우처럼/ 길고양이 룰랄라도 충분히 길들여진 채/ 이별의 적응기를 끝냈으므로 나를 떠나갔다 하여/ 염려하지 않기로 한다/ 돌아갈 시간이 머지않다는 것을 안다/ 엔딩자막이 올라오며 점멸하는 활주로에/ 꽃을 피우지 못해 울던 사구아로 선인장의 곡성이/ 화면을 채울 것이다"('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

 

여름이면 잡초들이 무성해지고 모기가 들끓는 마당에 거친 모래를 깐 뒤 박남준은 그곳을 걸을 때마다 '사막 사막 사막'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이 환청이 저 새드 무비를 악양의 밤하늘에 상영하게 만들었다. 이 별을 떠나려는 마당에 돌아보니 자신에게 맡겨졌던 이 생의 '서툰 배역'이 새삼 애잔하고, 길고양이 하나와 이별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가 떠나고 난 뒤 서러운 것들이 곡을 하며 애도할 것을 알기에 상처를 씻어낸 맑은 별들을 향해 흔연히 떠날 수 있을 터였다. 

 

"과녁이 되어 버렸다/ 가슴마다 화살이 되어 달려오는 별들은/ 왜 알고 있는 세상의 모든 탄사와/ 학습되지 않은 욕들을 자아내는가/ 드디어 칭기스 보드카 병이 쓰러진다/ 흔들린다 비틀거리며 춤춘다/ 초원의 바다 그 수평선으로부터/ 그늘 깊은 사구 너머 지평선까지/ 길을 잃은 별 떼들이 온밤을 마구 질주한다"('별 떼들이 질주하네')


이번 시집 말미에는 서른두 개의 연작시를 '산에 드는 시간'이라는 제목 아래 배치했다. '쓸쓸하다는 것은/ 누군가를 향하여 피워 올린/ 오랜 날들의 그리움이/ 그 기다림이/ 이윽고 깊어졌다는 것'이라고 쓰고, '아랫집 강아지가 시끄럽다/ 사슬 때문이다/ 나 또한 얼마나 많은 줄에 묶여 있는가/ 포기하고 길들여지고 익숙해지기까지/ 은발의 머리칼을 갖게 되기까지'라고 돌아보는가 하면, '항아리에 담겨 익어가고 있다/ 상처의 시간을 건너서/ 풋내 나던 차 향기가 무심해지기까지/ 고개 숙여지기까지/ 산다는 것/ 강이 되어 강물로 흐르며/ 강을 내려놓는 일'이라고 읊조린다.

▲전주 인근 모악산 시절(위)의 미소년이 지리산 자락 악양에서 은발 성성한 '늙은 어린 왕자'가 되었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박남준은 "요새 내가 지나쳐버린 것들은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절을 하고 산책하다가 마주치는 생각들을 긁적거린다"면서 "인도에서는 나이 오십이 되면 광야에 나가서 기도하라고 가족들이 떠밀기도 한다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나도 문득 마땅히 산에 드는 시간이어야 하지 않나 싶었다"고 말한다.

1984년 '시인'지로 등단한 이래 8번째 펴내는 시집인데 어떤 점이 달라진 것 같으냐고 묻자, 그는 '돌아보는 영혼에 화끈거리던 열기/ 얼굴을 감싸던 두 손이 기억하리라/ 낯 뜨거운 시의 문을 언제 닫을까'라고 적은 시인의 말을 언급하며 "불혹 지천명 이순의 나이를 넘어오면서 보니 옛날에는 시에 조바심을 냈다면 지금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정도가 달라진 거 같다"고 말했다. 그는 '저만큼 재촉하는 바람의 시간이/ 탄식으로 눈 내리는 시베리아 자작나무 숲으로/ 그늘 깊은 사막의 사구 너머/ 별들이 기다리는 바오밥나무 아래로/ 나를 이끌고 갈 것이므로/ 신파처럼 낡은 창을 열어놓고' 있다고 '시인의 말'을 맺었다. 그는 오늘도 절을 하며 낡은 창을 연다.

 

"내 어리석은 이마가 바닥에 닿을 수 있으니/ 절하겠습니다/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다리가 있으니/ 절하겠습니다/ 두 손을 모아 기도할 수 있으니/ 절하겠습니다/ 삶의 간절함은 어디에서 오는지/ 비로소 눈먼 날들이 나를 여기 이끌었는지/ 살아 있으니 절합니다/ 내 안의 당신께 절합니다"('내 안의 당신께')

UPI뉴스 /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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