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분계선을 13번 넘은 사나이

김당 / 기사승인 : 2021-05-11 17:3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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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당의 시크릿파일Ⅱ] 정보사 북파공작 국가범죄와 흑역사 6
정보사 부사관 전역한 홍재곤씨…번개·무지개·황소공작 등 13회 침투
홍 씨 "마지막 소원은 헤어진 누이 재회하고 6인의 전우들 보상받는 것"

지난해 12월 국군 정보사령부 원사(元士)로 전역한 홍재곤(72세) 씨가 수기(手記) 노트를 들고 기자를 찾아왔다. 앞서 그는 전화로 HID(육군 첩보대) 북파(北派) 무장공작원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 홍재곤 씨가 서울현충원 제53묘역에 묻힌 전우들의 유골없는 가묘에 소주를 따르고 있다. 다른 전사자들의 묘비와 달리 이들의 묘비에는 전사한 장소가 빈칸으로 남아 있다. 적진에 무장공작 침투했다가 전사한 사실을 기록으로 남길 순 없기 때문이다. [김당]

 

홍 씨는 기자가 쓴 책 〈공작〉을 읽고 연락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알고 보니 그는 〈공작〉의 주인공인 흑금성 공작원 박채서씨와 정보사 예하의 902정보부대 캠프 그레이 에넥스(서울 대방동) 한미 합동대에서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었다.

 

홍씨는 호리호리한 체격에 선한 눈매를 가진 70대 노인이었다. 막연하게 머리속에 그렸던 '살인병기'라는 별칭의 북파공작원 이미지와는 딴판이었다. 북파공작원에 대한 기자의 선입견이 무색해졌다.

 

하지만 나중에 홍 씨의 젊을 적 사진을 보고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그는 북파공작원 시절에 노출된 고엽제 피해와 그로 인한 대장암 수술 후유증으로 호리호리한 몸매가 된 거였다.

 

홍씨가 가져온 두툼한 스프링 노트 수기(A4 용지 200쪽 분량)에는 어마무시(?)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물론 개인의 주관적 경험담이기에 취재와 객관적 검증이 필요한 내용들이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확인했다.

 

1960년대 중반 '국립소년직업훈련소'에서 매년 정원(500명)의 5%에 해당하는 소년들(14~18세)을 북파공작원으로 물색, 1967년 응징보복 북파 무장공작에서 전사한 번개1호 팀원(팀장 포함 6명)에 대한 판문점 시신 인수 거부, 북파공작원들의 무공훈장 공적서를 '적진 침투'에서 '대간첩작전'으로 조작 등이었다.

 

정보사 물색관들이 서울역 등지에서 무연고자나 고아들을 감언이설로 꾀어 북파공작원으로 양성했다는 것은 알려진 서사구조(敍事構造)이다. 하지만 국가가 운영하는 아동복리시설에 수용된 14~18세 아동들을 조직적으로 물색한 것이 밝혀지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명백하게 실정법(아동복리법 등)을 위반한 국가 범죄였다. 당시의 국립소년직업훈련소 '운영규정'(보건사회부령 제155호)에 따르면, 훈련생의 입소 기준과 연령은 '(육아)시설에 수용된 14세부터 18세 이하의 남아아동'으로 제한되었다.

 

▲ 1962년 7월 19일 인천 구산동에 건립된 국립소년직업훈련소 준공식 테이프 커팅. 이주일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가운데)과 정희섭 보건사회부장관(맨오른쪽), 김병삼 내각사무처장(맨왼쪽) 등 군사정부 요인들과 착공 자금 2억 환을 기증한 김영귀(풍한산업), 채몽인(대륭산업), 이봉수(신일기업) 등 독지가들이 함께 했다. [국가기록원]

 

이런 국가 범죄는 국가안보와 군사기밀이라는 방패를 무기로 지난 50여년 동안 은폐돼 왔다. 국가, 즉 북파공작을 실행한 군(정보사)과 이에 대한 조정∙감독 책임이 있는 국가정보기관(중앙정보부)이 북파공작원을 국가안보를 위한 응징보복 작전의 '1회용 소모품'으로 간주하고, 이들의 물색∙양성∙침투∙사망의 전과정을 군사기밀로 분류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국립소년직업훈련소 준공식 때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이주일 부의장이 대독한 훈시에서 "직업훈련에 그치지 말고 인간개조에 하나의 발판이 되어야 한다"면서 "기술은 일생의 재산이다"라고 강조했다. 국가는 그 몇 해 뒤부터 소년 훈련생들을 사탕발림과 목돈의 유혹으로 속여 대패와 보습 대신에 대검과 총을 쥐어주고 '살인병기'로 인간 개조했던 것이다.

 

이런 국가 범죄를 추적할 수 있었던 것은 북파공작원(특수계약직 사병)과 북파공작원 훈련조교(하사관), 정보사 행정운영담당관(원사) 등으로 복무한 홍 씨의 독특한 정체성 덕분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0년 당시 명예회복과 보상을 요구하며 서울 시내에서 '가스통 시위'를 주도한 북파 공작원들은 대부분 1950~1960년대 한시적으로 북파공작원으로 복무했던 이들이다. 당시 국민회의 김성호 의원이 공개한 1950년대 HID 제1교육대 '종결공작원 명부'에 따르면, 이들의 평균 활동 기간은 258일이었다.

 

이들의 복무기간은 달수로 치면 1년이 채 안되는 8~9개월이다. 적진 침투는 그야 말로 사지(死地)로 들어가는 위험한 작전이다. 그만큼 이들의 복무기간도 수명만큼이나 짧았던 것이다. 이후 1960년대 HID가 AIU로 바뀐 뒤에는 물색과 교육훈련, 침투의 전과정이 좀더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홍 씨는 남북간에 비무장지대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1967~1969년 동안 적진에 13회나 침투해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고도 운 좋게 살아남아 충무무공훈장을 받았다. 홍 씨와 함께 복무한 북파 무장공작대원들 40명 중 6명(사망률 15%)이 전사했다.

 

국방부 특수임무수행자보상심의위원회가 홍 씨의 민원에 답변한 회신문에 따르면, 국방부가 보상을 위해 산정한 홍 씨의 특수임무수행 기간은 52개월(66. 7. 15~70. 10. 12)이다. 앞서의 제1교육대 출신 북파공작원들과 비교하면 6배 정도 더 장기복무한 것이다.

 

홍 씨는 북파 기간이 길어질수록 남은 것은 '개죽음'뿐이란 사실을 목도했다. 그는 자대인 인천101첩보대에 끈질기게 계약해지를 요구해 마침내 3년만에 하사관으로 양성화되었다. 이후 1969년부터 정보사에서 북파 무장공작대 및 단독첩보수집 공작원 훈련조교와 행정운영담당관 등으로 1998년까지 복무했다.

 

홍 씨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한 1998년에 6월 30일자로 정보사에서 전역했다. 32년 군복무를 마치고도 만49세였던 것은 그가 16살에 소년병으로 차출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북파공작원들처럼 '가스통 시위'에 선뜻 나서지 못한 것도 그 자신이 북파공작원이자 북파공작원을 키운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북파공작원과 북파공작원 훈육조교, 그리고 북파공작 행정운영담당관으로 복무한 북파공작의 '산증인'이기에 그의 증언과 기록은 의미가 있다.

 

▲ 1945년 9월 말 미군 사진병 돈 오브라이언(Don O' Brien, 왼쪽)이 38도선 인근에서 소련군을 만나 찍은 기념사진. [돈 오브라이언 flickr 캡처]


예를 들어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직후에 우리 군의 응징보복 작전으로 전개한 '황소공작'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소련군사고문관 사살' 등이 사실로 확인되면 소련군사고문단이 1958년에 완전 철수했다는 학계의 기존 연구를 뒤집는 것이다.

 

[표] 홍재곤 씨가 참여한 주요 북파 무장공작 횟수(13회)

공작명

일시

팀원

공작 성격∙내용

전과

번개2호

1967. 7

6명

군관막사 폭파 등

적 군관막사 폭파

오성산

1968. 6

5명

1∙21사태 응징보복

적 남침로 유동병력 기습공격

호랑이

1968. 8

5명

1∙21사태 응징보복

잠복조 5명 등 7명 사살, AK소총 노획

태풍

1968. 9

5명

1∙21사태 응징보복

적 12사단 지역 기습공격

무지개

1968. 10

5명

1∙21사태 응징보복

3사단 관할 민통선 야전천막에서 숙식하며 적 12사단 지역 8회 침투(3명 사살)

황소1호

1968. 11

5명

1∙21 및 울진∙삼척 사태 응징보복

소련군사고문관 등 20여명 사살(귀순한 북한군 707GP장 신문첩보로 확인)

 

그런 점에서 홍 씨가 '직접' 참여한 북파 무장공작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굳이 '직접'을 강조한 것은 무장공작은 임무에 따라 적진 침투 폭파공격팀과 전∙후방 지원팀으로 나뉘는데 후방 지원조로 참여해도 무공훈장을 받기 때문이다.

 

홍 씨는 훈련조교로 양성화되기 전까지 3년 동안 번개2호 △오성산 △호랑이 △태풍 △무지개 △황소1호 등 6개 북파 무장공작에 참여했다. 이 가운데 더러는 추가로 교차검증이 필요한 내용들도 있지만, 그동안 알려진 북파 공작사를 다시 써야할 내용들도 있다.

 

홍 씨가 참여한 번개2호 팀과 함께 동시다발 작전에 참여한 번개1호 팀은 최○형 팀장과 경계조 김○재, 폭파조 김○덕∙장○혜, 후방경계조 전○성 등 5명이 전사했다. 척후조 신○환은 적진에서 교전 중 탈출한 유일한 생존자이다. 그는 전우들이 사살된 장면을 목격하고 혼자만 살아 돌아왔다는 자괴감에 시달리다가 1991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우울증으로 자살했다.

 

북한군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기습공격한 1∙21사태에 대한 응징보복 작전으로 기획한 오성산 공작은 북한군 주요 남침로의 유동 병력을 기습공격해 적을 사살∙납치하는 것이 골자였다. 오성산은 나중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전방시찰한 곳으로 알려졌다.

 

호랑이공작과 태풍공작은 모두 1∙21사태에 대한 응징보복 무장공작이었다. 둘 다 아군 3∙6사단과 접경한 북한군 12사단 관할 부대에 대한 기습공격 작전이었다. 특히 호랑이공작의 경우 북방한계선 앞 북한군 잠복호를 기습공격해 잠복조 5명 등 북한군 7명을 사살하고 AK소총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무지개공작 역시 전선공작이지만 단발성 공작이 아니라 아군 3사단 관할 남방한계선 민통선 지역에서 야전천막을 치고 숙식하면서 적 12사단 지역에 침투해 수시로 기습공격과 군관납치를 시도한 다발성(8회 침투) 무장공작이었다.

 

홍 씨의 수기를 보면, 당시 적지역 강원도 평강군 하진리 일대를 거의 매주에 한번씩(9월 13일 새벽 1시, 9월 22일 밤 10시, 9월 27일 새벽 1시, 10월 15일 밤 9시, 10월 21일 밤 10시 등) 침투한 것으로 돼 있다. 이때 재수(?)없게 조우한 북한군 3명이 사살되었다.

 

황소1호 공작은 본디 1∙21사태에 대한 응징보복 작전으로 기획되었다가 호랑이공작 목표와 침투경로가 겹쳐 연기되었다. 그러다가 1968년 10월말에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터지자 작전을 강행해 1개 소대 병력 중 소련군사고문관을 포함해 20여명을 사살하는 망외(望外)의 전과를 거두었다. 이 같은 전과는 그 뒤에 귀순한 북한군 707GP장 유대윤 소위의 신문첩보로 교차 검증되었다.

 

홍 씨가 국군 제9965부대 부대장(정보사령관)으로부터 확인받은 '복무사실 확인서'에 보면, "상기자는 1968. 6. 15~1968. 11. 16 강원도 평강시 평강군 하진리(CT 535417) 지역에서 복무한 사실이 있음"으로 돼 있다. '하진리(CT 535417)'의 좌표는 그가 적진에서 복무했음을 뜻한다.

 

홍 씨는 무지개공작 기간에 6개월 동안 적 지역에 침투해 잠복한 것을 특수임무수행 기간에 어떻게 산정했는지를 질의했다. 그러자 정보사측은 홍 씨에 대해 침투공작 횟수를 총 13회로 산정해 보상금을 지급했다고 답변했다. 무지개공작 기간의 침투 횟수를 8회로 산정한 셈이다.

 

▲ 홍재곤씨의 전역증. 1949년생인 홍씨의 임관일이 18세인 67년 9월로 돼 있다. [홍재곤 제공]

 

전과(戰果)와 무공훈장 뒤에는 적지 않은 희생과 상흔이 뒤따랐다. 앞서 말한 번개1호팀은 팀장과 대원 등 5명이 적진에서 전사했고, 유일한 생존자인 척후조 신○환은 혼자만 살아 돌아왔다는 자책감에 시달리다가 1991년 외상후스트레스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에 따른 우울증으로 비관 자살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자살한 북파공작원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PTSD)는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극심한 스트레스(정신적 외상)를 경험하고 나서 발생하는 심리적 반응을 지칭한다. 베트남전, 이라크전 참전용사 영화에서 흔히 보는 소재다.

 

북파공작원들도 예외가 아니다. 훈련과 실전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료들과 적진에 침투했다가 혼자서만 살아 돌아왔다는 죄책감과 악몽에 시달리다가 끝내 자살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홍재곤 씨의 북파 무장공작 전우만도 4명이 자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극한 체험에 따른 PTSD 환자는 그뿐이 아니다. 번개2호 후방경계조 채○덕도 PTSD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 침투공격조와 후방 지원조를 포함해 작전에 참여한 대원 전원이 무공훈장을 받은 황소공작의 김○동 팀장은 2008년 집앞 근린공원에서 목을 맸고, 척후조 임창호도 자살했다.

 

홍 씨 자신도 황소공작에서 왼쪽 장단지에 총탄 부상을 당했다. 또한 다른 북파공작원들과 마찬가지로 고엽제 노출에 의한 피해를 겪고 장해 판정을 받았다.

 

적진에서의 작전 중 생존율은 이른바 기도비닉(企圖秘匿)에 달려 있다. 북파공작원들의 실전훈련도 군견에 들키지 않고 공격목표에 접근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그런데 북파공작원들이 실전에서 잠복 중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건 모기떼였다.

 

홍 씨가 작전에 투입된 1968년 7~8월에는 전방 사계청소(射界淸掃) 차원에서 고엽제를 대량 살포했다. 이로 인해 북파공작원들뿐만 아니라 전방 수색대원들도 고엽제에 노출되는 피해를 겪었다.

 

특히 북파공작원들은 잠복 중 모기를 쫓기 위해 제초제를 물에 이겨 얼굴과 피부에 바르고 침투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홍 씨 역시 고엽제 피해로 인한 장해 등급을 판정받고 나중에는 대장암 수술을 받기도 했다.

 

홍 씨는 북파공작 13회 침투 횟수와 고엽제 피해를 인정받아 다른 특수임무수행자들보다는 상대적으로 많은 액수의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잃은 것은 돈으로 대신할 수 없는 것들이다.

 

▲ UPI뉴스가 발굴한 '미공개 대한뉴스'(KC 제375호) 영상. 이주일 최고회의 부의장(왼쪽 하단)과 정희섭 보사부장관(오른쪽 상단)이 '훈시'를 하고, 14~18세의 앳된 훈련생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다. [국가기록원]


그는 국립소년직업훈련소에 들어가 제주도 말목장에서 일하는 청운의 꿈을 잃었다. 그와 함께 입소한 직업훈련소 출신의 공작원 50명 중에서 6명이 전사했다. 4명은 임무를 마치고 PTSD에 시달리다가 자살했다.

 

그의 마지막 소원은 북파공작 기간에 연락이 두절돼 헤어진 하나뿐인 동기간인 누이동생과 재회하는 것이다. 또한 국립서울현충원 제53묘역에 시신 없이 가묘로 안장된 6인의 전우들의 형제나 유족이 정당한 보상을 받는 것이다.

 

정보사 행정운영담당관으로 복무한 홍 씨는 "전우들은 나와 같은 국립소년직업훈련소 출신의 고아들이라서 부모는 없지만 형제자매 중에 동기간이 한 사람은 있을 것"이라며 "이들의 신상과 공작 사례가 정보사 특수처에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보관 중이니 어떻게든 연락을 취해 보상을 해줘야 한다"고 당부했다.

 

((다음에는 박정희에 대한 충성경쟁의 산물인 각종 응징보복 부대들의 실상이 이어집니다))

UPI뉴스 / 김당 대기자 dangk@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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