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무용가 최승희 1938년 LA공연이 보이콧 당한 이유

UPI뉴스 / 기사승인 : 2021-06-22 15:4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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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최승희 연구가 조정희 PD
난징 대학살로 미국 내 반일 정서 급격히 고조
미국 정부와 시민단체, 소수민족까지 일화배척
일본 여권으로 여행하던 최승희 진퇴양난 고초
1938년 2월2일 저녁 8시45분, 미국 LA 다운타운의 윌셔 이벨 극장(Wilshire Ebell) 극장에서는 최승희 선생의 조선무용 공연이 열렸다. 1월22일 샌프란시스코 공연에 이어 미주 순회 두 번째 공연이었다.

이벨 극장은 약 1270석의 객석을 마련해 1927년에 개관된 이탈리아 양식의 화려한 극장이다. 극장 건물 오른쪽에 이벨 여성클럽 회관이 자리 잡고 있다. 이 회관은 미국의 선구적인 여성교육 운동가 아드리안 이벨(Adrian Ebell, 1840–1877)의 주장을 실천하기 위해 1894년에 결성된 여성운동 단체 <로스엔젤레스 이벨(Ebell of Los Angeles)>의 클럽하우스다.

이벨 극장은 개관부터 LA지역 문화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여류비행사 에밀리아 에어하트(Amelia Earhart, 1897-1937)의 강연과 전설적인 여배우 주디 갈랜드(Judy Garland, 1922-1968)의 오디션이 이곳에서 개최되었고,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Glenn Gould, 1932-1982)가 바하와 베토벤을 연주했던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한인 동포사회의 주요행사가 열리는 이 극장에서 최승희 선생이 83년 전 조선무용 공연을 개최했던 것이다.

▲ LA코리아타운 인근에 있는 윌셔이벨극장. [페이스북 by Dave PD·조정희 PD 제공]

그러나 공연 당일 이벨 극장 앞은 소란스러웠다. 루선 불러바드를 가득 메운 시위자들이 수십개의 피켓을 들고 공연 보이콧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이로 인해 많은 관객들이 발길을 돌렸고, 최승희 선생의 LA초연은 비평가들의 극찬에도 불구하고 흥행은 저조했다.

최승희 평전 저자들은 이 시위가 재미 조선인 동포들이 주도한 것이며, 최승희가 조선인 동포들을 외면하고 일본공관과 일본계 언론사들과 협력했던 것이 그 원인이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최승희(Choi, Seunghee)'라는 조선식 이름이 아니라 '사이 쇼키(Sai Shoki)'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한 것이 미주 독립운동단체들에게 '일제의 앞잡이'라는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면적 관찰이었다. 당시의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던 LA의 조선인 동포들과 독립 운동가들이 그처럼 단편적인 사실을 기반으로 최승희 선생의 역사적 공연을 방해했을 리 없었다.

<신한민보>를 비롯한 당시의 동포 언론은 최승희를 비난하거나 공연 보이콧을 주장한 적이 없었다. 제한된 지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최승희 선생의 무용 작품들을 일일이 소개하면서 이 공연의 의의를 서술한 장문의 기사도 내보냈다. 특히 2월3일자 <신한민보>에 보도된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보아 LA 동포들이 최승희를 배척할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다.

"26일 라성(=로스앤젤레스) 한인은 최승희 여사 일행을 위하여 시내 중국찬관 '서현루'에서 만찬회를 개최하고 저녁에는 환영회를 열었는데, 환영회 석상에서 라성 청년부는 최여사에게 기념금배를 증정하여 경애의 뜻을 표시하였다."

이벨 극장 앞에서 벌어졌던 시위는 조선인이 주축도 아니었고, 시위의 대상이 최승희를 겨냥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주의적 침략을 자행해 온 일본을 규탄하는 시위였고, '일화배척(日貨排斥)'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전역을 휩쓸기 시작한 일제 불매운동의 일환이었다.

반일 시위와 일화배척 운동에 조선인과 유대인, 중국인과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다수 앞장섰던 것은 사실이다. 일제에 나라를 잃은 조선인은 말할 것도 없고, 유대인들은 나치독일과 동맹을 맺은 추축국이라는 이유로 반일 시위에 나섰다. 중국인들은 일제의 중국침략을 규탄했고, 동남아시아로 마수를 뻗는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반대하는 사회주의자들도 나섰다.

하지만 당시의 신문보도를 보면 반일 시위와 일화배척에 나선 것은 미국 내 소수인종과 사회주의 운동가들만이 아니었다. 1937년 10월9일자 <동아일보>는 "격렬해지는 각지 일화배척운동"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1937년 일본의 중국 침략에 항의하기 위해 미국 여성들은 실크스타킹을 포함한 일제 실크 불매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미국은 실크 제품을 전량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었으므로 여성들의 일제 실크 불매운동은 일본에 막대한 피해를 주었다. [네덜란드 국립아카이브·조정희 PD 제공]

"미국에서의 일본관계 상품의 제조업자중 반일적인 파에 의하여 <미국제품표준보호동맹>이 결성되어 일본의 원료품 및 제조품의 영구적인 보이콧 운동을 개시하기로 되었다고 한다. 기타 미국 <반전 반파시즘> 연맹과 <중국민중의 벗> 협회는 반일운동의 착수로 1일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가든에 시위대회를 개최하고 일본상품의 보이콧 등을 결의하였다. 또 미국노동총동맹(AFL)과 산업조직위원회(CLO)에서도 근간 개시되는 연차대회에서 일화배척이 문제로 될 것을 예상하고 대책을 협의중이라고 전한다."

최승희 선생의 LA 이벨 극장 공연 4개월 전부터 미국에서는 반일 시위와 일화배척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단체들이 결성되었고, 전국적 규모의 노동조합들도 합세했다.

미일관계는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켰을 때부터 나빠지기 시작했으나, 1937년 7월 일본의 도발로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악화되었다. 특히 그해 10월 일본군이 상해를 점령하면서 미국이 조계지를 잃게 되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10월5일, 이른바 <격리 연설(Quarantine Speech)>을 통해 추축국에 대한 경제제재를 발표했고, 미국인들은 일제불매운동에 돌입했다.

미국 여성들은 일제 실크스타킹 불매 운동에 나섰고, 미국 정부는 석유와 고무, 철강의 교역 제한 조치를 강구하기 시작했다. 일본으로 흘러들어가는 달러가 전쟁 자금으로 전환되고, 교역품이 군수물자로 전용되어 미국 공격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1937년 12월13일 일본군이 난징을 함락한 직후부터 6주간 자행한 포로 및 양민 대학살이 알려지면서 미국인들의 반일 감정은 고조되었고, 최승희 LA공연이 있었던 1938년 2월초에는 미국 전역에서 반일 시위와 일화배척 운동이 과격해지고 있었다. 더 나아가 1940년으로 예정된 도쿄 올림픽까지 보이콧하려는 움직임도 일었다.

따라서 최승희 선생의 LA공연이 보이콧당한 것은 재미 조선인 동포들의 몰이해나 감정적 앙금 때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것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이 악화되었기 때문이었고, 정부와 시민단체와 노동조합, 그리고 미국 내 소수민족들까지 합세해 벌인 반일 시위와 일화배척 운동 때문이었던 것이다.

일부 평전 저자들은 이벨 극장 앞에서 시위를 주도하던 한 흥사단원이 최승희에게 "'나는 일본사람이 아니라 조선사람'이라고 하면 후원해 주겠다"고 했으나 최승희는 "일본 대사관원들이 감시하고 있었고 일본에는 딸과 무용연구소가 있었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고 하였다"고 서술했다. 이 서술에 대한 문헌증거는 없고 의문의 여지가 있는 증언에 기반한 서술이다.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그 흥사단원의 진의는 왜곡되었을 수 있다. 백인들과 다른 소수인종 시위자들의 최승희 공연 보이콧을 안타까워한 나머지 최승희 선생이 '나는 조선인이다'라고 발표만 해주면 공연 보이콧을 막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최승희는 일본 영사관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그런 발언을 할 수 없었고, 결국 공연은 보이콧되었다.

이 같은 일은 뉴욕에서도 일어났다. 한 조선인 동포가 최승희의 호텔에 전화를 걸어 "라디오 방송으로 배일연설을 하지 않으면 공연을 훼방 놓겠다"고 협박했다고 일부 평전자들이 서술했다. 이 서술에도 자료 출처가 없었고 증언이 모호한 것은 LA 공연 보이콧 사건과 비슷하다.

설사 전화가 걸려왔더라도 이는 '협박'이 아니라 '제보'나 '경고'이었을 수도 있다. 모처럼 성사된 최승희의 뉴욕 공연이 보이콧되는 것을 막고 싶었던 것이다. 최승희 공연은 '일제 공연'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나서지 않아도 미국 시민들과 소수인종 운동가들이 보이콧을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희소한 자료에 의지해 80여 년 전의 사건을 재구성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해석 오류의 가능성도 상존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문헌 증거만으로도, 재미 조선인들이 감정적으로 최승희를 배격했거나 그의 공연을 보이콧했던 것이 아님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겠다.

1938년 2월2일, 윌셔 이벨 극장에서 열렸던 최승희 선생의 LA데뷔 공연은 한민족의 무용 작품이 미주에서 공연되었던 역사적인 공연이었다. 이같은 공연이 보이콧 되었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 원인은 결코 재미 조선인 동포들의 몰이해나 감정적 대응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국 정부가 앞장서고, 전국 노동조합을 포함한 각종 사회단체들과 일반 시민과 소수인종까지 총동원되었던 전국적인 반일 시위와 일제 불매운동 때문이었던 것이다.

▲조정희 PD

조정희 PD(최승희 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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