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순열 칼럼] 신분사칭, 반칙이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류순열 / 기사승인 : 2021-07-14 18: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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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대선정국의 최대 이슈는 이회창 여당(신한국당) 후보의 두 아들 병역비리 의혹이었다. 둘 모두 체중 미달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장남은 키 179㎝에 몸무게 45㎏, 차남은 키 165㎝에 몸무게 41㎏으로 면제받았다.

정상면제냐, 병역기피냐. 취재 경쟁이 불붙었다. 특히 장남 몸무게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언론은 키가 180이나 되는 남자의 몸무게 이력을 좇아 중학교 학적부까지 뒤졌다. 그러나 변죽일 뿐이었다. 의미있는 몸무게는 적어도 성인이 된 뒤의 몸무게였지만 누구도 확인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떠오른 아이디어가 건강검진이었다. 해마다 받는 장남의 건강검진 기록의 몸무게를 확인하면 될 터였다. 장남 직장인 한 국책연구기관으로 내달렸다. 총무부서 관계자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무심히 툭 던졌다. "여긴 건강검진 어디서 받아요?","서초동 ○클리닉이요."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그 다음이 막막했다. ○클리닉 건강검진 자료의 그 몸무게를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방법은 하나, 신분 사칭 뿐이었다. 정직한 것도, 성공이 보장된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게라도 진실의 문을 두드려봐야 했다. ○클리닉으로 전화를 걸었다. "○○○○○○연구원 총무과입니다. ○○○ 씨 검진결과 확인이 필요합니다. 작년 기록 찾아 키와 몸무게 좀 불러주세요. "

5분 뒤 다시 전화를 걸었다. " 키 179, 체중 58키로입니다." 특종을 낚는 짜릿한 순간이었다. 신분 사칭이 아니었다면 그 진실에 접근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는 53㎏을 넘어본 적이 없다"던 이 후보 측의 비공식 반론은 한방에 무너졌다.

요즘 MBC 기자들의 경찰 사칭 사건이 논란이다. 야권 대선주자 윤석열 전 검찰총장 부인 관련 취재중 신분을 사칭한 건데, 잘못된 일이라는데 이견을 달기 어렵다. 윤 전 총장 측은 "강요죄와 공무원자격사칭죄라는 중대 범죄를 범한 것"이라며 경찰에 고발했다. 파주경찰서가 수사를 시작했다. 형사처벌을 피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신분사칭은 반칙이다. 용납될 수 없다는 건 자명하다. 이로써 취재현장의 윤리가 명쾌하게 정리되는 걸까. 그러나 취재현장이 늘 교과서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다. 기자 신분이 드러나는 순간 취재가 중단되는 현장이 적잖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신분 사칭이 불가피한 경우가 있다.

결론. 때로는 부득이하게 그 반칙이 필요하다. 더 큰 가치,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느냐가 관건이다. 1997년의 상황을 다시 맞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겠지만 분명한 건 그 시절의 반칙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 류순열 편집국장


UPI뉴스 / 류순열 편집국장 ryoosy@upi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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