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만의 직설] 김종인, '현실적 진보주의자'의 고독

UPI뉴스 / 기사승인 : 2021-07-21 13:3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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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까지도 좌파니 우파니 하면서 시대착오적 명분에 휩쓸리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마저 들어요. 이미 전쟁이 끝났는데 어느 섬에 숨어 있다 뒤늦게 뛰어나온 낙오병 같아요."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하 존칭 생략)이 지난 1월에 출간한 <김종인, 대화: 스물 효인 묻고, 여든 종인 답하다>에서 한 말이다. 최근 직함을 기준으로 부르는 관행 때문에 언론에선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불리지만, 5년 전엔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이자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이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일부 사람들은 그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을 넘나드는 것을 이상하게 보지만, 그건 "이미 전쟁이 끝났는데 어느 섬에 숨어 있다 뒤늦게 뛰어나온 낙오병"처럼 살아선 안 된다는 자신의 지론을 실천한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김종인, 대화>는 나의 예상을 깨버린 책이었다. 처음엔 시큰둥한 자세로 읽기 시작했다. 그간 나온 정치인들의 대담 형식의 책이 뻔하더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그의 돌직구 품성과 더불어 세상을 이해하고 분석하는 그의 '해박한 지식 내공'이 빛을 발한 덕분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 잘 설명된 김종인의 경제민주화, 노동 문제, 공화주의 등에 관한 생각을 읽어보시라. 기존 구분법에 따르자면, 그는 진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냉정한 현실주의 감각이 책 곳곳에 잘 드러나 있다. 나는 김종인을 '진보적 현실주의자' 또는 '현실적 진보주의자'로 부르고 싶다.

국가 전체의 오늘과 내일을 보는 그의 관점과 안목은 탁월하다. 하지만 품성과 기질은? 나는 최근 출간한 <인물과사상 1>에서 김종인의 단독자 품성과 돌직구 기질의 명암에 대해 논한 바 있기에 여기서 반복하진 않으련다. 다만, 윤석열에 대해 '별의 순간'을 처음 언급했던 그가 "운동을 다녀오느라 윤 전 총장의 대선 출마 기자회견을 못 봤다"고 말했다는 기사를 보고서, 내 분석이 틀리진 않았구나 하는 생각에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는 것만 말씀드리련다.

'현실적 진보주의' 노선은 쉬운 길이 아니다. 고독으로 가는 길이다. 왜 그런가? 아직 진보·보수의 이분법 체제가 강고하게 살아있으며, 이 체제를 움직이는 힘은 관성이기 때문이다. 관성이란 무엇인가? 미국의 사회운동가 사울 알린스키가 1960년대의 신좌파 학생 운동가들을 향해 던진 쓴소리에 그 답이 숨어 있다. "그들은 사회를 바꾸는 데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일, 자신을 발견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 증명일 뿐 혁명이 아니다."

진보건 보수건 그들의 첫 번째 사명은 민생을 잘 돌보는 일이다. 진보·보수의 차이는 방법론의 차이이며,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이건 이론일 뿐이다. 현실 세계에서 진보·보수는 민생보다는 반대세력을 염두엔 둔 자신의 존재 증명이나 밥그릇에 더 관심이 있다. 진보·보수 가치의 실천보다는 진보·보수처럼 보이는 말을 함으로써 반대세력과의 차별화에 더 공을 들인다. 쉽게 말해, 정치를 반대편 때리기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길로만 나아간다는 것이다.

진보·보수가 그런 관성대로 치닫다보면 반드시 사고가 나게 돼 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종인이 진보·보수에 모두 비상대책위원장으로 투입돼 성공을 거둠으로써 '정당 소생술사'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유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에겐 그런 관성이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어느쪽에서건 관성의 전위에 섰던 강경파들을 억누르고 관성을 성찰의 대상으로 삼아 진보적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상식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줄 수 있었다. 김종인이 아니었다면, 박근혜의 입에서 '경제민주화'라는 말이 나오리라는 걸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김종인은 성공 후엔 버림받게 돼 있다. 그가 도움을 준 정당은 잠시 성공을 만끽한 후 순식간에 이전의 관성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근혜의 입, 아니 머리 속에서도 경제민주화는 곧 사라지고 말았다.

김종인은 어느쪽 정당이건 관성대로 치닫다 골병이 들 때에 '소생술사'로 부름을 받는 기간을 제외하곤 늘 고독할 수밖에 없다. 이게 바로 조직이나 집단의 속성이라 할 관성으로부터 자유로운 단독자의 고독이다.

다만 그런 관성이 불멸의 법칙은 아닌 만큼 기대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으리라. 나는 김종인의 관점과 안목이 한국 정치를 발전시키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미 끝난 소모적 이념전쟁을 민생 중심의 실사구시 경쟁으로 전환시키는 데에 큰 기여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가 81세의 고령임에도 한국정치의 지평을 바꾸는 맹활약을 한 걸 가리켜 '할배이즘'이라는 애칭이 생겨났지만, 꼰대를 혐오하는 그 어떤 젊은이마저 꼰대로 보이게 만들 수 있는 그의 진취적인 관점과 안목에 더 주목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모처럼 좋은 책을 읽어 흐뭇했다.

▲ 강준만 교수

강준만(전북대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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